호시노 미치오 란 일본인 사진작가가 있다. 어려서부터 북극을 동경했던 그는 1978년 알래스카로 건너와 평생을 여기서 보냈다. 이 여행기의 시스마레프편에도 잠깐 나온다. 까까머리 소년 시절에 시스마레프에서 여름 한 철을 보내기도 했으니까. 호시노 미치오는 알래스카의 자연과 사람을 렌즈에 담아 미국과 일본의 잡지와 출판물에 실었다. 15권에 이르는 그의 책은 2000년대 중반부터 우리나라에도 차례로 번역됐는데, 그 중 <바람같은 이야기>는 그 해 론칭한 대한항공의 알래스카 취항 광고 제목으로 쓰이기도 했다.


그 책에 칼라 화보로 실려 있던 카리부떼의 사진을 잊을 수 없다
. 여기에는 야생사진이라는 말로는 다 담지 못할 만큼의 삶과 죽음과 사랑이 가득 차 있다라는 그의 철학자스러운 멘트도 오래도록 기억에 남았다. 호시노 미치오의 사진은 유난히 초록색이 쨍하게 잘 나오는 후지 벨비아 필름으로 찍은 것처럼 보이는데, 어떻게 보면 또 촌스러워도 보인다. 그러나 그의 그 투박한 사진과 세련되지 못한 글에서 나는, 말로는 어떻게 설명하지 못할, 진정성을 느꼈다. 지금도 느낀다. 그는 1996년 러시아 캄차카에서 불곰을 촬영하다 습격당해 목숨을 잃었다. 작정하고 연출하려해도 쉽지 않았을 자연 다큐작가스러운 죽음이었다.


(페어뱅크스 북극박물관 앞에서 본 풍경. 저 끝의 흰머리산이 데날리입니다)

나는 알래스카 중부 페어뱅크스 에 와 있었다. 정확히는 알래스카대학 페어뱅크스 분교의 북극 박물관 Museum of the North’ 복도였다. 박물관 복도에는 호시노 미치오의 사진들이 걸려 있었다. 호시노 미치오는 80년대 초반 이 대학 야생동물학부의 학생이었다. 호시노 미치오가 사망한 뒤 부인 나오코는 그의 사진 150여점을 이 대학에 기증했다. 평생을 극북의 마을들을 떠돌았지만 그의 은 페어뱅크스였다. 해안의 에스키모와 내륙의 인디언들이 교역하던 알래스카의 오랜 옛 마을. 지도에서 알래스카를 잘라 들고 연필 위에 세워 무게중심을 잡으면 그 끝은 페어뱅크스에 얹혀 있을 것이다.


그 페어뱅크스에 여름이면 일본인 관광객들이 전세기까지 대절해 날아온다. 호시노 미치오의 집으로 성지 순례를 오는 것이다. 이 무례하면서도 수줍은 관광객들이 집까지 찾아와 놓고는 차마 들어가지 못하고 밖에서 어찌나 알짱거렸는지, 그의 부인과 아이가 제발 좀 그만해라고 애원했다고 한다. 우리가 묵은 B&B의 소심한 주인 아저씨는 일본인들에게 호시노 미치오는 신이라고 삐쭉거리면서도 간판 밑에 일본어로 방 있음이라고 붙여 놨다. 북극 박물관도 일본인 패키지 성지 순례코스여서, 아니나 다를까 박물관 숍에는 호시노 미치오의 사진집이 오로라 사진집과 패키지로 묶여 팔리고 있었다. 일본인 관광객을 위한 맞춤 상품 되겠다. 호시노 미치오 못지않게 일본 관광객들이 사랑하는 것이 또 오로라다. 전세계에서 가장 오로라가 잘 보이는 캐나다 옐로나이프의 오로라 관광객의 90%가 일본인이다. 신혼부부가 오로라를 보면 천재를 낳는다는 관광업계 발 전설도 만들어냈다. 그렇다면 에스키모 어린이들은 다 아인슈타인이 됐어야 하는 것 아닌가


(호시노 미치오의 사진집을 잔뜩 팔고 있는 '북극 박물관 기념품가게. 역시 박물관은 전시물보다 기념품가게가..)

알래스카 대학 페어뱅크스 분교(UAF)가 자랑하는 북극박물관은 명성대로였다. 가히 알래스카의 대영 박물관이라 할 만하다. 여기서 알래스카에도 대학이 있느냐고 묻는 분들께 말씀드리자면, 알래스카 대학 본교가 앵커리지에 있고, 페어뱅크스에 분교가 있다. 특히 UAF는 북극 연구가 특화돼 있다. 나는 언젠가 북극곰을 UAF 기후변화과정에 입학시키고 나는 싸커맘이 되어 두해 쯤 페어뱅크스에서 잘 살아 보겠다는 꿈을 갖고 있다. 우리는 북극 박물관을 구경하러 가는 바쁜 길에 틈을 내 학교 행정실에 들러 혹시 석달쯤 해 볼 만한 어학연수 코스가 없냐고 물어봤다. 생각만 해도 가슴이 벅찼다. 자전거를 타고 학교로 가고, 주말에는 도시락을 싸서 빙하로 하이킹을 떠나고, 금요일 밤엔 알래스칸 라이프스타일 Alaskan Lifestyle’에서 곰 퇴치 스프레이며 방울 같은 것들을 사오는 거다. 행정실 직원은 냉정하게 머리를 흔들었다. “아뇨, 어학연수하러 여기까지 몇 명이나 오겠어요?” 


다음날은 렌터카를 몰고 북쪽으로 달려갔다
. 노랗게 물든 자작나무 잎과 참새의 혀처럼 뾰족 내민 침엽수의 새 잎들이 점점이 찍혀, 풍경은 점묘화가의 작품 같았다. 우리는 교외의 UAF 연구소에 잠깐 들러 사향소 에게 손을 흔들어 주었다. 사향소는 둥글게 말린 뿔 두 개가 갈기와 함께 달려 있는 북극 소다. 사향소떼가 씩씩거리며 눈밭을 달려오는 사진을 보면, 매머드와 함께 마지막 빙하기를 보냈어야 할 것 같이 생겼다. UAF 연구소에 연구용 사향소 농장이 있다고 했는데, 정말 사향소 십 여 마리가 한가롭게 풀을 뜯고 있었다. 갈기는 침이라도 발라 빗어놓은 것처럼 단정하게 앞가르마가 타져 있었다. 크지도 않았다. 송아지만 했다. 나는 사향소가 매머드만은 못해도 코끼리만은 할 줄 알았다. 눈발이 붙어있는 갈기를 휘날리며 준엄하게 인류를 꾸짖을 줄만 알았다. 나의 실망한 마음 따위는 아랑곳 않고, 사향소들은 영구같은 얼굴을, 참으로 싹싹하게도, 자꾸만 들이댔다


(싹싹한 사향소들입니다. 뭐 먹을 거 업수?)

한 시간쯤 달리니 알래스카 송유관 이 나왔다. 북극해에서 시추한 석유를 알래스카를 가로질러 남부의 프린스 윌리엄 해협까지 옮기는 거대한 파이프다. ‘관제 설명은 알래스카에 강림하신 과학 기술의 경이를 칭송하고 있었는데, 얼어붙은 영구동토층에 파이프를 세우기 위해 3년간 노력한 끝에 1977년 첫 석유가 프루도 베이에서 송유관 속으로 들어갔다, 석유는 장장 800마일을 달려 한달 뒤에야 발데즈 해안 터미널에 도착했다, 그런 이야기들이었다. 소풍을 나온 가족이 송유관 그늘 아래 손바닥만한 잔디밭에 앉아 아이를 무릎에 앉혔다. 송유관 조사팀에서라도 나온 듯 면밀하게 다각도로 사진을 찍던 관광객 아저씨는, 주머니에서 지구 모양의 조그만 공을 꺼내더니 송유관 이음새 틈에 끼우고 사진을 찍었다. 아무 일도 일어날 것 같지 않은 가을날 오후였다.


그러나 알래스카 송유관은 원주민의 삶을 송두리째 바꿔 놓았다
. 송유관이 지나가면서 원주민들은 처음으로 땅에 대한 소유권을 주장하기 시작했다. 연방정부는 석유가 발견되는 땅에 사는 부족들에게 배당금을 지급했다. 북극해에 면한 배로우는 같은 에스키모 마을이라도 부자 마을이다. 한편으로 배당금 제도는 에스키모 우민화 정책이란 비판도 받았다. 일자리는 주지 않고, 돈만 주는 거다. 이런 정부의 돈 폭탄에도 넘어가지 않은 부족이 있었으니, 바로 알래스카 중부의 아크틱 빌리지(Arctic Village)에 사는 그위친족이다. 광활한 알래스카를 유목하며 살아온 그들은 석유 배당금 대신 살 권리를 선택했다. 연방정부로부터 지원을 받지 않으며 세금도 내지 않는다. 누구든 아크틱 빌리지를 방문하려는 자는 부족장의 허가를 받아야 한다. 북극곰은 몇 년 전 아마도 한국 기자로는 최초로 아크틱 빌리지를 다녀왔다. 장작을 패서 불을 떼고, 원주민과 친해 보고자 순록 고기를 집어 먹다 온몸에 두드러기가 나기도 했다


(페어뱅크스 교외를 가로지르고 있는 알래스카 송유관. 나무 키를 보시듯이, 엄청 큽니다)

페어뱅크스 시내의 걸리버 북스토어에는 알래스카섹션이 따로 있었다. 훌륭한 서점이었다. 새 관측 가이드만 책장 하나다. 개썰매를 몰고 캐나다에서 알래스카까지 24번 탐험했다는 크누트 라스문센이며, 알래스카 북부 국립야생동물보호지구에 사는 덫사냥꾼 하이모 코스며, 오지의 마을과 섬들을 연결하는 소규모 독립 항공의 부시 파일럿들의 이야기도 책장 가득이었다. 알래스카와는 관련 없지만, 부시 미국 대통령 사진을 하루하루 붙여 놓은 365일 달력도 있었는데, ‘1년 동안 꾸준히 보시면 다시는 찍지 않으실 겁니다라는 광고 문구가 붙어 있었다. 우리는 10권의 책을 사고, 9장의 지도를 샀다. 주머니를 탈탈 터니 39달러와 동전 한 줌이 남았다. 이번 여행은 여기까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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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어릴 때 우리 집에는 아문센-난센-피어리-스콧을 한 권에 묶은 위인전이 있었다. 그 위인전 시리즈 편집자는 관련이 있는 인물을 네 명씩 묶어서 위인전 50권을 만들었다. 1권이 석가모니-예수-마호메트-소크라테스였던 것 같다. 그 덕분에 아직도 밀레를 들으면 무조건반사적으로 고흐-고갱-세잔이 떠오른다.


아문센 외 3명은 세기의 위대한 탐험가 콜렉션이었다. 아문센은 남극점을 세계 최초로 찍었고, 피어리는 북극점을 세계 최초로 찍었(다는 논란을 남겼)으며, 스콧은 아문센보다 늦게 남극점에 도착했다 돌아오는 길에 세상을 떠났다. 지금도 그렇지만 그 때에도 나는 난센이 가장 좋았다. 병약해 보이는 모범생이 스키로 그린란드를 횡단하고 프람호로 북극점을 향해 나아갔다는 이야기는 몇 번을 읽어도 좋았다. 염소 같은 콧수염이 있는 난센 얼굴 표지를 넘기면 줄거리 요약 페이지였다.




(난센이 탔던 프람호의 식기. 이 식기와 똑같이 생긴 그릇을 박물관 기념품가게에서도 팔아요)

독후감 숙제를 내려고 줄거리를 베껴 쓰면서 나는 그 페이지 윗부분에 있는 배 사진을 보곤 했다. 고물과 이물 끝이 둥글게 말려 있는 나무 배였다. ‘노르웨이 오슬로에 있는 바이킹의 배’. 연필 뒤꼭지를 이빨로 물어뜯으면서, 언젠가 나도 하인리히 슐리이만처럼 세계 여행을 떠나서 이 배를 볼 수 있을까, 하고 생각했다 (다른 위인전에 슐리이만이 트로이 유적 발굴로 떼돈을 벌어 마차를 타고 세계 여행을 다니는 사진이 있었다). 그렇지만 그 꿈은, 2030년이 되면 날개 달린 신발을 신고 달나라로 걸어서 간다는 것처럼 불가능해 보였다.


오슬로를 가게 된 것은 비행기 마일리지 때문이었다
. 몇 년간 마구 신용카드를 긁고, 일부러 빙빙 돌아 둘러간 덕분에-예를 들어 런던을 가면서 굳이 싱가포르 항공을 타고 적도 찍고 가는 식으로-마일리지가 제법 쌓였다. 북극곰이 스타 얼라이언스 루트 계산 프로그램을 다운받아 몇 달을 연구한 결과, 북극점에서 1300km 떨어진 세계 최북단 노르웨이령 스발바르 제도를 유럽 표준 마일리지 공제로 다녀올 수 있다는 놀라운 사실을 알게 됐다. 서울-방콕-덴마크 코펜하겐-노르웨이 오슬로-노르웨이 트롬쇠-스발바르 라는, 비행기를 다섯 번 타는 일정이었다.

이것이 과연 마일리지로 가능한 일정인지 의심스러웠던 북극곰은 항공사 마일리지 부서에 여러 차례 전화를 걸어 확인을 했다
. 바쁜 낮에 전화하면 직원이 장난 전화인 줄 알고 짜증 내실까봐 한밤중에, 그것도 새벽 2, 3시를 기다려 전화를 걸었다. , 트롬쇠요, 트롬세탁기 할 때 트롬. 공항코드가 TOS, , 스칸디나비아 항공인데 편명이... 하품을 하고 있던 새벽 근무 직원들은 놀라지도 않고 좌석을 확인해 주곤 했다. 나중에 들은 이야기지만 한밤중에 항공사로 별의별 전화가 걸려 온단다. 술이 취해 747 여객기 바퀴가 몇 개 인지 물어보는 사람도 있단다. 18개다. 인천공항에서 정말로 탑승권 세 장이 출력돼 나오자 감개가 무량했다. 트롬쇠와 스발바르행은 노르웨이에 가서 받아야 하는 바람에, 오슬로에서도 하룻밤 자기로 했다. 공항에는 축구 선수 홍명보가 팔짱을 끼고 서 있는 에어컨 광고가 걸려 있었다. 월드컵 광풍이 도시를 달구던 6월이었다.




(역전 아스트리아 호텔 창밖의 낮비 내리는 오슬로)

오슬로에는 비가 내리고 있었다. 의당 바이킹 배가 전시된 박물관으로 달려가야 했지만, 일단 먹을 것부터 찾았다. 바이킹 배라도 뜯어먹고 싶을 만큼 배가 고팠다. 밥 좀 먼저 준다고 도도하게 베지테리언 밀을 부탁했더니, 당근, 오이와 무 삶은 것만 나왔다. 기차역의 냄새도 맛있어 보였다. 눈 앞의 편의점에서 샌드위치와 콜라, 물을 사고 몇 걸음 가지 못하고 피자 스탠드에서 샐러드와 조각 피자도 샀다. 역 푸드코트 의자에 앉아 꾸역꾸역, 목이 막힐라 쑤셔 넣었다.


(새우가 너무 많아서 징그럽지 않습니까?)

먹을 게 들어가고 나니 날씨도 맑아 보였다. 역 앞 광장의 호랑이 동상 으로 열 살쯤 되어 보이는 소녀 네 명이 깔깔거리고 기어 올라가 노래를 불렀다. 동전이라도 던져 줘야 하나. 지갑을 꺼내는데 영수증이 따라 나왔다. 그런데 이게 뭐냐. 편의점 샌드위치 1만원, 콜라 3000, 샐러드와 피자 세트 3만원. 출장 왔던 모씨가 별 생각 없이 공항에서 택시 탔다 20만원을 냈다는 이야기가 그제야 생각났다. 이 도시의 물가는 서울의 딱 3배였다.


잠시 잊고 있었지만 여기는 노르웨이 오슬로였다
. , 세계에서 가장 비싼 도시다. 그렇잖아도 비싸다는 북유럽 3국 물가는 서쪽으로 갈수록 고공 행진이었다. 헬싱키는 그래도 견딜 만 했고, 스톡홀름은 불평할 만 했지만, 오슬로는 그저 고개를 저을 수밖에 없었다. 이 식사가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다. 빵 한 조각 살 때마다, 커피 한 잔 마실 때마다 재빨리 머리를 굴려 한국 돈으로 얼마인지 계산하고, 주먹을 불끈 쥐고 도둑놈들!” 이라고 소심하게 저항하는 일이 매번 반복됐다.


중국집에선 남는 음식을 싸달라고 해서 다음날 도시락으로 먹었고
, 파스타 집에선 1인분만 주문해 나눠 먹었다. 그 때마다 박노자 교수 생각이 났다. 우리 안의 숨은 파쇼성을 발견해서가 아니었다. 오슬로대에서 한국학을 가르친다던데, 어떻게 이 비싼 도시에서 먹고 살 수 있을까 궁금해서였다. 지금도 만나면 꼭 한번 물어보고 싶다. 그 박노자 교수가 계실지도 모를 오슬로대 앞 분수 광장에서 어린이 동상의 뒷태를 구경할 즈음엔 반짝반짝 햇살이, 돈도 받지 않고, 빛났다.



(소녀 & 시티)


(처녀 & 시티)

그렇지만 이 아름다운 북국의 도시는 관대하기도 했다. 뭉크 상설전이 열리는 내셔널 갤러리는 공짜였다. 낡은 관공서처럼 생긴 2층 건물에는 노르웨이가 자랑스러워하는 화가, 뭉크의 그림이 빼곡하게 걸려 있었다. 영화 스크림에 나오는 하얀 가면 같은 절규도 있었고, 몽환적으로 아름다운 마돈나도 있었다. 특이한 점은 이 두 그림이 액자 채 벽에 박혀 있다는 것이다. 몇 년 전 도난 사건 이후 경비가 강화됐기 때문이다. 도둑이 유유히 창문을 열고 들어와 벽에 걸린 그림을 떼 갔단다.


간도 크게 성큼성큼 그림을 들고 걸어 나간 도둑도 도둑이지만
, 그렇다고 그림을 아예 벽에다 못으로 박아버리는 발상도, 참으로 두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우고 싸나이십니다하지 않을 수 없다. 배를 타고 가다 육지가 나오면 배를 뒤집어 머리에 쓰고 전진했다는 바이킹의 후예답다. 바이킹의 후예들, 노르웨이 곳곳에선 대인배의 풍모가 풍겼다. 난센의 프람호를 정박된 그대로 박물관으로 바꿨고, 우리가 앞으로 가려는 스발바르에서는 외국인에게도 제한 없는 거주와 상업의 자유를 허용했다. 그 대인배들 앞에서 나는 소심하게도, 이 그림들을 서울 미술관에 가져갔으면 12000원씩 세 번에 나눠서 전시했을 것이라고 종알거렸다.


(커피 앤 시티)

그날 저녁엔 축구를 봐야 했다
. 비행기 안에서 본 헤럴드 트리뷴은 검은 돌풍가나와 이탈리아가 16강에 진출한다고 보도하고 있었다. 축구 팬들은 우리가 몇 년 월드컵 쯤 여행 중인지 짐작하실 수 있겠다. 이날 밤 오슬로 현지시각 오후 9시에는 스위스-한국전도 열린다. 이미 가방 깊숙이 챙겨 온 붉은 악마 티셔츠를 꺼내 입은 차였다. 우리 2인조 붉은 악마 노르웨이 원정대는 보무도 당당하게 카를 요한슨 대로를 활보했다. 환전소 청년은 우리의 붉은 옷을 보고 감개무량한 얼굴로 한국이 아직도 안 떨어졌구나! (오늘 경기가 있다는 말을 듣고는) 내 손가락과 발가락을 다 꼬아서 행운을 빌겠다!”고 격려해 주었다. 호텔 텔레비전으로 볼 것인가, 펍에서 백만 시청자와 함께 볼 것인가, 그것만이 문제였다

.

(카를 요한슨 거리의 스포츠 펍)

카를 요한슨 거리의 스포츠펍들에게도 이날은 장날이었다. 간판을 들고 있는 안내판들도 축구 유니폼을 뒤집어썼고, “100인치 LCD TV로 완전 중계!” (로 추정되는) 안내판들도 눈에 띄었다. 중계 예정 경기 대전표를 읽으며 우리는 적당한 펍 사냥에 나섰다. “...-프렌..프랑스” “..-...” “..-...” 모두 토고-프랑스전이었다. 축구도 못하면서, 노르웨이 사람들은 동양의 숨은 강자, 아시아의 빛나는 별, 지난 월드컵 4강에 이어 이번에도 16강에 진출한 한국에는 관심이 없었다. 이제는 축구 팬이 아니어도 우리가 몇 년 월드컵 때 여행 중이었는지 짐작하실 수 있겠다. 분필로 깨알만하게 적어 놓은 글자를 손가락으로 짚어가며 읽은 끝에 간신히 스위스-한국 전을 중계하는 펍 한 곳을 찾아냈다. 토고-프랑스 전을 중계하는 1층은 발 디딜 틈이 없었다. 2층은 한가했다. 우리를 포함, 4 테이블이 고작이었다. 한가운데 걸린, 100인치는 못 되고 50인치쯤은 되어 보이는 텔레비전으로 낯익은 붉은 색 유니폼이 보였다

.


(남방 안에 붉은악마 티셔츠가 숨겨져 있습니다만)

안타깝게도, 우리 선수들은 감당할 수 없는 적과 싸워 최선을 다했으나 졌다. 2인조 붉은악마 노르웨이 원정대가 테이블 위에 올라가 ~한민국!”을 외치기를 기대하는 소수의 축구 팬들의 눈길을 애써 외면하며, 우리는 쓸쓸하게 경기를 관전했다. 노르웨이 축구 해설자는 백분토론 진행자만큼이나 침착했다. 언제 공이 들어갔는지 자막을 봐야 간신히 알 수 있었다. 관객보다 먼저 흥분하고, 관객보다 나중에 절망하는, 차범근의 열렬한 해설이 너무도 그리웠다. 조금은 덜 쓸쓸할 것 같았다. 펍 밖으로 나오니 해가 지고 있었다. 가로등도 교회도 피리 부는 거리의 악사도 한참 붉게 물들고 있는 중이었다. 자정이 몇 분 남지 않은 북유럽 백야의 한밤중. 이 날이 우리가 노르웨이에서 유일하게 노을을 본 날이었다. 그 다음날부터는 24시간 해가 지지 않았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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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쏘댕기자 2011.04.08 14:17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마녀&thecity는 없나요

  2. 갈매 2011.04.14 11:00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이거 보고 뒤늦게.. 다시 스타얼라이언스 마일리지 프로그램 다운받아 돌렸는데.. 아직도 안익숙해..
    하지만 세계지도를 보고 어디론가, 낯선 나라에 가본다는 상상을 하는 것만으로도 기분은 좋아지더군..

    스발바르 제도.. 나도 가보겠어!! someday~!



스톡홀름은 쌀쌀맞은 도시였다. 공기부터가 쌀쌀했다. 공항버스 안에서 오오 역시 북유럽은 춥다며 긴 팔 남방을 꺼내 입었는데, 결국 돌아가는 공항버스를 탈 때까지 벗지 못했다. 8월말이었다. 해는 길었지만 자주 뜨지는 않았다


감라스탄 구시가 도 잔뜩 흐려 있었다
. 커다란 삐삐 인형 앞에서 브이자를 그리며 사진을 찍고 있으니, 점원이 나와 주먹을 입에다 대고 헛기침을 했다. 지도도 불친절했다. 골목은 좁았고, 그 골목이 그 골목 같아서 자꾸만 길을 잃었다. 쌀쌀맞지 않은 건 수학여행이라도 온 듯한 꼬마들뿐이었다. ‘세계에서 가장 좁은 골목길저편에서 한 놈씩 돌림노래로 니하오” “니하오키득거리며 뛰어갔다. 요놈, 딱 걸렸다. 이게 세계에서 제일 좁은 골목길이면 너희 나라 지리 지식에 심각한 문제가 있는 거다, 고 주장이라도 할까 싶었다. 스무 시간 가까이 비행기를 타고, 공항에서 세수하고, 기차역에 짐 맡겨 놓고, 지도 들고 헤맨 끝에 찾은 게 겨우 이 골목일 수는 없었다



(감라스탄 구시가의 우울한 골목길)

증권거래소
1층의 노벨상 전시관 찍고, 시청사 돌아, 왕궁 앞에 다다랐을 즈음엔 손으로 다리를 한 짝씩 들어 옮겨야 할 판이었다. 부릅떠도 자꾸만 눈이 감겼다. 마침 근위병 교대식이었다. 빨간 베레모를 쓴 근위대가 4열종대로 보무도 당당하게 왕궁으로 다가왔다. 내 평생 이렇게 군기 빠진 근위병들은 처음이었다. 다른 나라 근위병들은 얼굴에 파리가 붙어도 눈썹 하나 깜짝 않는다는데, 빨간 베레모 몇 개는 좌향 좌! 구호에 결연히 오른쪽으로 돌았다. 어이없어하는 나와 눈이 마주치자 겸연쩍게 웃기도 했다. 역시 북유럽의 공기는 자유로운 모양이었다. 군악대는 잘 맞지 않는 박자로 차이코프스키 피아노 협주곡 1번을 연주하고 있었다. 풍경이, 예쁘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학교 앞 팬시점에서 파는 노트 표지 사진 같았다. 좁고 높은 집들이 벽도 없이 어깨를 기대고 골목의 끝까지 이어졌다.


스톡홀름에서는 배에서 잤다. 물가 비싼 스톡홀름에는 두 개의 저가 숙소가 있다. 하나가 감옥을 개조한 호스텔이고, 나머지 하나가 여객선을 개조한 호스텔이다. 곰곰이 생각을 해 봤는데, 감옥과 배와 호스텔은 싼 값에 독방을 제공한다는 공통점이 있긴 하다. 운명은 모를 일이어서, ()감옥이 ()여객선보다 훨씬 비쌌다.


범선 호스텔이 정박돼 있는 스톡홀름 항구로 가면서 그래도 마음이 들떴다
. 바야흐로 물 위의 하룻밤 아닌가. 그러나 선원실이라는 것이 최소 공간에 최대 인원을 적재하기 위해 설계된 곳임을, 방문이 꽝 하고 닫히는 순간 비로소 깨달았다. 2층 침대를 중심으로 거울, 샤워기, 세면기가 모두 빌트 인돼 있었다. 누우면 머리와 다리가 정확하게 벽과 벽에 닿았다. 바람이 부는지 배가 천천히 삐그덕거렸다. 그래, 그래도 바다다. 손바닥만한 창문을 비틀어 열었다. 앞이 새카맸다. 물에 젖은 이끼 위로 거미 한 마리가 슬금슬금 지나갔다. 항구에 닻을 내린 배에서는, 누군가의 창문은 부두를 보게 돼 있다. 그게 이 방이었다. 창문 틈으로 부둣가를 달리는 자동차들의 불빛이 달빛인 양 들어왔다. 그날 밤 밤새 뒤척이며 나는, 세상의 모든 선원을 존경하게 됐다. 타이타닉호를 타고 대서양을 건넜으니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도 존경하기로 했다.


다음날에는 기차를 타고 라트비크로 갔다. 스웨덴 중부 실잔 호숫가의 작은 마을이다. 스톡홀름 같은 대도시엔 남아 있지 않은 스웨덴 고유의 시골 풍경을 찾아서 갔다고 하면, 미안하지만 거짓말이다. 기차를 타 보고 싶었는데, 적당한 거리에 호수가 있었고, 마침 호숫가 마을에 호스텔도 있기에 갔다. 열차는 스톡홀름 중앙역을 저녁 555분에 출발했다. 3시간30분 거리니까, 도착해도 해가 남아 있을 것이었다. 북극곰은 역 앞 마트에서 산 파스타 샐러드를 먹고, 나는 스웨덴 돈을 꺼내 놓고 접사를 시도했다. 지폐 뒷면에 닐스가 거위 몰텐을 타고 날아가는 그림이 그려져 있었다. 스피커에서 웅얼웅얼 소리가 났다. 세 번 났다. 그 때 뒷자석 남자가 의자를 쿡쿡 찔렀다. 혹시 안내방송 들으셨어요? 그렇죠, 스웨덴 말이어서. 지금 선로에서 사고가 났대요. 다음 역에 내려서 버스를 타고, 다시 기차를 타라고 하네요."



(거위 몰텐을 타고 가는 닐스가 그려져 있는 스웨덴 돈입니다)

정말로 사람들은 다음 역에서 모두 내렸다
. 내가, 불의는 참아도 불이익은 못 참는다. 일단 차장에게라도 따져야겠다며 소매를 걷어붙였다. 사회 시스템 잘 갖춰 있기로 소문난 북유럽에서, 1365일 중 오늘, 그것도 내가 탄 기차 시간에 맞춰, 그 노선에서 사고가 날 건 뭐란 말인가. 마침 비까지 부슬부슬 내리고 있었다. 승객들은 그러나 불평 한 마디 없이 조용히 철도 회사가 대기시켜 놓은 버스에 오르고 있었다. 눈이 마주친 한 할머니가 싱긋 웃으며 신문을 펴고 사과를 꺼내 베어 물었다. 이 사람들은 바쁘지 않은 것일까. 아니면 이건 어쩔 수 없는 일이라고 생각하는 것일까. 우리 차례가 왔다. 슬그머니 소매를 내리고 온 몸의 힘을 모아 차장에게 한 마디 던졌다. “땡큐


버스는 웁살라역에서 살라역까지 가는 것이었다. 웁스, 이런 헷갈리는 지명으로 나더러 어찌 살라고. 헷갈리는 것은 지명만이 아니다. 가이드북에도, 스웨덴 역사책에도, 관광지 안내문에도 보면 스웨덴 남자들은 이름이 카를’ ‘구스타프아니면 바싸. 웁살라에는 심지어 카를 구스타프 바싸라는 이름의 왕도 있었다. 그러고 보니 그 날 아침 메뉴에 호밀을 갈아 바싹 구운 것 같은 얇은 빵이 나왔는데, 그 빵 브랜드도 바싸였다. 몇 안 되는 고유명사를 알뜰하게 이용하는 스웨덴의 합리성에 대해 열띤 토론을 벌이고 있는데, 갑자기 사람들이 버스에서 후다닥 내렸다. 우리도 덩달아 뛰었다. 배낭에 매달아 놓은 등산컵이 의자 손잡이마다 부딪쳐 창피하게도 챙강챙강거렸다.


이름 모를 간이역이었다. 플랫폼에 매달려 있는 역의 이름은 Morgongava, ‘모르고()가바. 정말 모르고 가고 있는 중이었다. 알뜰할 뿐 아니라 여행자의 마음까지 읽는 인공지능 지명이아닐 수 없었다. 맞은편 선로로 들어오는 열차를 타고, ‘살라역에서 다시 갈아타고, 라트비크에 도착한 것은 밤 11시가 넘어서였다. 그 긴 북유럽의 여름 해도 이미 저물어 있었다. 은하계를 헤매는 철이와 메텔처럼 눈동자를 불태워 호스텔에 도착했다. 현관 도어매트 아래 열쇠와 함께 내 이름이 적힌 봉투가 놓여 있었다. “라트비크에 오신 걸 환영합니다! 숙소는 깨끗이 쓰시고요, 저쪽에 대걸레와 빗자루가 있으니 자기가 어지른 방은 자기가 치우고 가세요. 안 치우면 벌~! -에바북극곰의 코에서 주르륵 코피가 흘렀다.



(라트비크 실잔 호숫가의 조그만 교회에요. 마굿간이 87개나 있다는 믿을 수 없는...)

라트비크는 조그마한 시골 마을이었다
. 자전거로 한나절 둘러보기 딱 좋을 크기였다. 마굿간이 87개나 있었다는 믿을 수 없는 주장의 라트비크 교회에 가 보고, ‘아마도 세계에서 가장 긴 부두라는 몹시 회의적인 이름의 628미터짜리 긴 부두도 구경하고, ‘구스타프 바싸왕이 덴마크인을 무찌르고 세웠다는 가짜 룬스톤도 구경했다. 기차역 앞에도, 식당 선반에도, 서점에도 나무로 깎은 작은 말들이 있었다. 스웨덴 중부 지방 특산품이라고 했다. 오후에는 라트비크 도서관에 가서 이메일도 확인하고, 스웨덴의 이마트쯤 될 헴콕 수퍼에서 과자도 사 먹고, 강둑에 앉아 다리도 흔들었다. 오리 가족이 지나가면서 물에 비친 건물 그림자가 흔들리는 걸 보는 게 좋았다. 헤세의 소설에 나올 것 같은 목가적인 풍경이었다.



(라트비크의 명물 목마. 또가닥 또가닥)

스웨덴에서 돌아오고 일주일 쯤 뒤 북극곰에게서 전화가 왔다
.


라트비크 호스텔 그 때 밤에 청소했었지?”
... 대걸레로 닦진 않았지만 쓸긴 쓸었지. ?”
“‘청소대마왕에바한테 메일이 왔는데? 너희 청소 안 해서 벌금 물린다고.”


뭐라고? 혹시 방 안 닦은 걸 들켰나? 빗자루 대충 세워놓은 게 걸렸나? 옷걸이 위의 먼지를 안 닦아서 그런가, 커피잔에 물이 남아 있었나. , 정말이지 쌀쌀맞은 나라 같으니라고. 그렇다고 투숙객을 추적해 벌금까지 물리는 데가 어디 있어. 씩씩거리느라고, 북극곰이 뭐라고 하는 소리가 기차에서 왕왕거리던 스웨덴말처럼 들렸다.



<생각해 볼 문제>
글쓴이는 정말로 청소대마왕 에바에게서 메일을 받았을까요? 받았다면 무엇이라고 적혀 있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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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kws1070 2011.03.08 20:14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전 지금 스웨덴 진켄스담(T13,14라인)에 있는데 요기도 함 가봐야 겠네요 ㅎㅎ

    아이슬란드 정보 찾다가 우연히 접한 글들 재미나게 읽는 중입니다 ^^

    제가 묶은 숙소에는 다행이 벌금 물리진 않더군요 ㅋ

    지금도 스웨덴에 계신건가요??

    실시간 업데이트??


아이슬란드에는 한국 사람이 10명 산다. 2004년에엔 7명이었다.외교통상부 홈페이지, 인터넷, 아이슬란드 금융위기 취재를 다녀온 동료기자 등등의 말을 종합하면 유학생 1명과 일가족이 살다가 지금은 남자 셋, 여자 일곱 명이 산다. 어쨌거나, 아주 적은 수다. 아이슬란드 인구가 30만명 밖에 안 되긴 하지만, 우리 동포들이 남태평양의 외로운 섬, ‘축’ 같은 곳에도 봉숭아꽃을 심고 일가를 이뤄 살고 있는 걸 생각하면 정말 적다.

아이슬란드가 그렇다고 한국과 가까운 나라도 아니다.아이슬란드는 우리 역사 사회 문화 정치 경제 등등을 통 털어 딱 두 번 나온다. 냉전을 종식시킨 레이캬비크 회담과, 최근의 금융위기다. 아이슬란드를 갈까 해요, 했을 때 열 명 중 일곱 명은 그거, 영국 옆에 있는 나라죠? 라고 물어봤다. 학교 다닐 때 사회과 부도를 열심히 본 세 명은 아이슬란드가 북유럽에서 10시 방향, 그린란드 근처에 있는 섬나라라는 것을 기억해냈다. 이야기를 장황하게 하는 까닭은, 요약하자면 아이슬란드와 한국은 '남'이라는 이야기다. 그런데 새벽 1시 30분 아이슬란드 레이캬비크 아르나볼 호텔 카운터의 남자 직원은 문을 열고 들어오는 우리를 보자마자 말했다. "한국 사람이죠?" "네?"


어쩜 어떻게 그렇게 한 눈에 알아봤을까. "아이 빌리브 통일교" 그는 헛기침을 두어번 한 뒤 속삭이듯 "문선명"이라고 덧붙였다. '명진'이라는 한국 이름을 중간 이름으로 갖고 있는 그는 수련차 "양푱"(경기 양평인 것 같다)에도 몇 차례 오셨으며, 한국 여자와 결혼한 친구도 있고 한국어를 배우려는 친구도 있다고 했다. 레이캬비크에는 통일교와 무관하지만 '갈비 김'이라는 한국 식당도 있단다.그럼 아이슬란드 동포의 절반을 차지하는 한국인 일가가 운영하나? 안타깝게도 아니란다. 그러나 한국식 온돌은 있었다. 객실 바닥은 전기 온돌로 뜨끈뜨끈했다. 역시 통일교 신도가 운영하는 호텔이어서, 한국의 선진 문물을 일찌감치 수입해 오신 모양이었다.



(홀그림 키르카 종탑에서 본 레이캬비크 시내. 예쁩니다)

아이슬란드도, 레이캬비크도 두 번째였다. 동포 수가 아직 7명이던 2004년, 인도도 유럽도 7박8일이면 찍고 도는 한국인이, 남한 크기만한 조그만 섬 하나 일주일에 못 보겠냐며 호기롭게 떠났으나 결국 절반도 못 보고 꼬리를 내린 채 돌아와야 했다. 일단, 아이슬란드에는 도로가 거의 없기 때문이었고 (섬 전체를 한바퀴 도는 2차선 링 로드가 거의 유일한 고속도로다), 또 지명이 도저히 발음할 수 없도록 생긴지라 지리를 파악하고 물어보는 데 짧지 않은 시간이 걸렸기 때문이었다.


레이캬비크는 뭐, 혀가 좀 꼬일 듯 말 듯 하지만 그렇다고 쳐 주자. 그러나 Kirkjubaejarklaustur 라든가, Landmannalaugar 같은 건 뭐라고 읽어야 할 지 아직도 모른다. (읽어 보시지. 안 읽어진다) 영어에 능통한 우리 아이슬란드 주민들께서 내가 더듬더듬 “커큐백...” 하면 “아! @#$%!”라고 발음해 주셔서 아직도 모른다. 생각난 김에 말해두자면, 시규어 로스나, 비요크는 정말 이름 쉽게 지은 거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도저히 상상할 수 없는 풍경이 언덕을 넘을 때마다 나왔기 때문이었다. 초코 파우더를 뿌린 것 같은 붉은 산 입구에 커다란 구멍이 있고, 그 아래 회색 용암이 보글보글 피어오르는데, 바로 옆 기암 절벽 폭포가 있고 맞은편엔 빙하가 둥둥 떠 있는, 뭐 이런 식이었다.



레이캬비크도 만 맞은 편으로 머리가 납작한 ‘이스자’산을 마주하고 있다. 처음 며칠은 산 중턱에 구름이 걸린 줄 았았다. 그러나 산 자체가 그렇게, 상암동 하늘공원처럼 생긴 것이었다. 하루 종일 빗발이 뿌렸다 그쳤다, 우박이 후두둑 떨어지기도 했지만, 레이캬비크는 햇살이 잠시 비쳐들었던 오전 10시의 풍경으로 기억돼 있다. 근대적 의미의 ‘정주’가 시작된 지 채 200년이 안 되는 이 도시는 레고 블록에서 뽑아와 세운 것처럼 아기자기하다. 유럽의 여느 나라처럼 르네상스식의 성당도, 바로크식의 궁전도 없지만 용암이 분출하는 모습을 형상화했다는 몹시 모던한 교회가 언덕 꼭대기에 있다.




(레이캬비크 다운타운입니다. 토요일밤엔 술취한 청년들이 어슬렁 거렸다는..)

교회 종탑에서 내려다보면 시내가 한 눈에 들어온다. 빨갛고, 노랗고, 초록의 지붕을 한 집들 사이로 노란색 버스가 지나다닌다. 맥도날드도, 스타벅스도, HMV도, 세븐 일레븐도 없는 도시. 북위 64도의 세계에서 가장 북쪽에 있는 수도. 물뿌리개가 아니라, 분무기로 뿌리는 것 같은 빗방울을 피해 우리는 인포메이션 센터로 뛰어가고, 서점으로 달려가고, 식당으로 들어가고, 갤러리와 벼룩 시장도 갔다. 어느 블로그에 보면 비요크가 이 벼룩 시장에서 장 보는 사진도 있단다.


특별히 좋을 기억도 없었는데, 나는 레이캬비크가 그 하루 동안 3배쯤은 좋아졌다. 일요일 오후의 시내는 적당히 한산하고 적당히 붐볐다. 론리플래닛 아이슬란드편을 사려고 기웃거렸던 서점들에서는 커피 볶는 냄새가 났다. 서점마다 커피숍이 딸려 있어서다. 하나, 둘, 셋, 네 번째 서점에서야 비로소 책을 살 수 있었다. 이 작은 도시에 이렇게나 서점이 많다니. 생선창고로 쓰였을 법한 건물에서 열리는 주말 벼룩시장에도 헌책 좌판이 펼쳐져 있었다. 거리마다, 모퉁이마다, 담배 냄새가 날 것 같은 가죽 의자가 놓인 보헤미안 커피숍들이 나타났다. 천장이 유리창이어서 환하게 느껴지는 에이문드슨 북숍에서 커피와 초코케이크를 먹으며, 레이캬비크에 다시 온다면 북숍과 보헤미안 커피숍 투어를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시내 어딘가에 그려져 있던 벽화에요. 자세히 보면 아랫부분에 가운데 바이킹 모자가 있음)


이따금 ‘건수’를 찾는 사람들이 맥주집이나 식당 앞을 북극곰처럼 어슬렁거렸다. 가이드북에 설명에 따르면 레이캬비크 사람들은, 언제나 그렇게 술을 마실 건수를 찾고 있는 모양이었다. “레이캬비크에서 술은, 맛을 보기 위한 용도가 아니라 주말 저녁 마시고 뻗기 위한 용도다.” 사실 이 설명은 "주 7일 뻗기 위해 술을 마시는" 한국에서 온 내게 좀 어려웠다. 그게 뭐! 어쩐지 어젯밤 자정을 넘긴 시각에도 사람들이 삼삼오오 어슬렁거리며 클럽과 호프의 모퉁이를 서성대더라니. 후드티를 뒤집어쓰고 겨드랑이에 제 팔을 낀채 쭈뼛거리는 사람들은 한밤중의 좀비들처럼 보였다.


한편으로, 주중에는 술을 먹지 않는 것이 일반적이어서, 수요일이나 목요일 오후에 술을 시키면 알콜 중독으로 오해받기 십상이란다. 아마도 그것은, 살인적인 술값 때문에 만들어진 관습일 것이다. 식당에서 맥주 한 잔을 시키려면 700코로나, 우리 돈으로 7000원이다. 적어도 2배 비싼 것이어서, 세계 최고의 베지테리안 레스토랑, ‘네스투 그루섬’ 에서 밥을 먹으면서 우리는 맥주 대신 콜라를 시켰다. 이 베지테리언 레스토랑은, 7년 전이나 지금이나 여전히 세계에서 가장 맛있는 곳이었다. 감동한 나는, 나중에 꼭 이 집을 벤치마킹해 베지테리언 메뉴를 파는 북카페를 만들겠다고 씩씩하게 사업 구상을 설명했다. 북극곰은 걱정어린 눈으로, 꼭 그런 생각을 했던 사람들이 홍대 앞에 훌륭한 베지테리언 식당 겸 카페 겸 헌책방을 냈다가 쫄딱 망했다고, 알려주었다.



(생선창고 벼룩시장에서 파는 아이슬란드 스웨터. 올 겨울 유행하는 노르딕 스웨텁니다)


(만원 주고 산 비옷. 냉동창고에서 생선 장만하는 용도로 보입니당)


어쨌거나, 레이캬비크는 앞으로 아이슬란드 일주를 위한 베이스캠프가 아니었던가. 여기저기 기웃거리면서 런던 히드로 공항에서 속아서 어이없는 환율로 환전해 온 아이슬란드 코로나를 다 써버렸다. 벼룩시장에서 생선공장 냉동창고에서나 쓸 법한 비옷을 1만원을 주고 건졌고, 인포메이션 센터에서 아이슬란드 휴대폰 심카드를 2만5천원에 샀다.
GSM폰 하나만 있으면 세계 어디서나 휴대폰을 쓸 수 있다더니 정말이었다. 몇 년 전 중국에서 헐값에 사 온 GSM폰에 아이슬란드 심카드를 넣으니 바로 개통됐다. 호텔에서는 무선인터넷도 잡혔다.


아이슬란드 유스호스텔 홈페이지에서 지도를 다운받고 새로 장만한 휴대폰으로 다음날 묵을 숙소를 예약했다. 엑스피디아 닷컴에서 최저가 렌트카를 찾아 예약하고, 아이슬란드 도로 교통 정보 사이트로 들어가 교통량도 확인했다. 이 조그만 나라는 놀랍게도 교통량을 실시간으로 제공하고 있었다. 말하자면 추풍령~충주 구간 오늘 4대 지나갔음, 뭐 이런 식이다.
아이슬란드 기상청 홈페이지가 제공하는 이주의 기상정보에 따르면, 오늘도 비, 내일은 약한 비, 모레는 강한 비가 온다.북극곰은 오로라 예보 사이트에 들어가 9월말 현재 오로라대가 아이슬란드에 걸쳐져 있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오늘은 미약하지만 모레는 평균 수준은 될 것이다.



(아이슬란드 심카드가 들어있는 GSM 휴대폰. 오른쪽입니다. 노트북에 띄워져 있는 화면은 아이슬란드 교통정보량 사이트에요)


우리는 아이슬란드의 ‘이마트’, 분홍돼지가 그려진 ‘보너스' 로 달려갔다. 마실 물과, 데우기만 하면 된다는 카레와, 물만 넣고 끓이면 된다는 즉석밥과, 론리플래닛 여행정보사이트 가시나무포럼 여행자들이 하나같이 ‘강추’한, 아이슬란드 무공해 젖소들이 한방울 한방울 모아 만든 요거트 스카이르Skyr와 초콜릿 바른 과자를 잔뜩 샀다. 털털거리는 빨간색 중고 피에스타 자동차의 뒷좌석과 짐칸에 옷과 먹을 것을 쑤셔넣고, 컴퓨터를 켜서 시규어 로스의 ‘헤임라’를 틀어놓고, 우리는 남쪽으로 출발했다.



(아이슬란드 요거트 스카이르)



(초콜릿 입힌 과자. 빈츠 비슷한 맛이에요)



(맥주입니다. 폴라 '비어')

(마지막으로 한장 더. 레이캬비크 시내에 세워져 있던 '화장실' 안내판입니다. 화장실을 찾기 힘든 걸까요? 엄청 크더라고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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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까만주름 2011.01.17 22:59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한인들이 좀 늘었나? 내가 자기한테 물어보고 해서 갔던 2008년엔 두가족(두 가족은 친척이라고 들었음)이 살고 있었고 각각 가족수가 3명과 4명이어서 7명이라고 들었는데. 여하튼 나는 게을러서 기록도 거의 해두지 않고 르포기사 하나 쓰고 말았는데 역시나 자기가 자세하게 기록해둔 것을 보면서 그 음울했던 출장을 떠올려 보네. '세상에서 가장 맛있는 스프집'이라는 허름한 식당엘 간 적이 있었는데 정말로 맛있었고, '송장의 맛'이라는 악명이 붙어 있다는 아이슬란드 전통 독주의 알싸한 맛도 기억이 나는군... 여하튼 고마워.

  2. 딸기 2011.01.19 11:45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여행기 넘 재밌다!
    작년에 아이슬란드 화산폭발 했을 때, 그 화산 이름을 어떻게 읽어야하는지를 놓고
    CNN이 현장 리포트까지 했었지. 결국은 대부분 기사에서 화산 이름을 빼어버렸다는...



미국 모텔에 관한 책을 읽다가, 문득, 모텔이라면 나도 좀 안다고, 떠들고 싶은 생각이 참을 수 없이 솟구쳤다. 한동안 수없이 출장을 다녀야 하기도 했고, 노루꼬리만큼 주는 휴가도 악착같이 나가 놀았기 때문에, 숙박 업소라면 나도 좀 안다. 정말 이런 데서 나 혼자 자야 한단 말인가, 안타까워서 침대를 치며 잤던 으리으리한 호텔들도 있었고, 오늘 밤을 과연 무사히 넘길 수 있을 것인가 걱정을 하며 잠을 잤던, 숙박 업체라고 할 수 없는 숙소들도 있었다. 


감옥을 개조해서 만든 호스텔에서도 자 봤고-샤워를 하고 났더니 신발 위에 파리가 30마리쯤 앉아 있었다-, 한여름밤 창문 없고 선풍기 없고 에어콘 없는 벌집 같은, 인도의 어느 시장통 구석의, 창문을 열면 소가 똥을 싸고 있는 호텔에서도 자 봤다. (최악의 숙소는, 기차역 안의 즉석사진 부스였다). 한편으로, 코넌 도일도 와서 주무시고 가셨다는, 창문을 열면 그림같은 호수가 보이는 호텔에서도 자 봤고, 전용 버틀러가 딸린, 특급열차의 마호가니 침대칸에서도 자 봤다. 

말하자면 이런.... 2008년 G8 정상회의 숙소였던 홋카이도 윈저 호텔. 창 밖이 러브레터다.


그러나 가장 많이 잔 곳은 어쩌고 저쩌고 '모텔'이었다. 어느 이른 봄날 출장길, '펜션'에서 한번 자 보겠다며 들어갔다가 밤새 불을 안 때 주는 바람에, 추위를 잊기 위해 밤늦도록 고스톱을 쳐야 했던 날 이후로 출장길엔 언제나, 모텔에 들어가서 잤다.


모텔만큼 좋은 곳은 없다. 24시간 문 열고, 따뜻한 물이 펑펑 나오고, 채널을 잘 돌리면 섹스 앤 시티도 나온다.
벌써 수년전인데, 지리산 자락의 어느 컴컴한 모텔에서 텔레비전을 켰더니 섹스 앤 시티가 나오고 있어서, 신기해했던 기억도 난다. 출장 때문에 수없이 모텔을 다니다 보니 어는 날 옆구리를 찌르며 "우리도 모텔.."하는 남편에게, 나는 너무 많이 가서 지겨워서 더 이상 갈 수 없으니 혼자 가라, 고 했던 적도 있다. 지방 출장을 갔다 급하게 기사를 보내라는 바람에, 근처 읍내 모텔로 들어가 반나절 끊고 기사도 보내고, 샤워도 하고, 컵라면을 먹었던 기억도 난다. 


모텔은 '오토모빌+호텔'인데, 유럽에는 많지 않은 미국형 숙소다. 땅이 넓다 보니 중간에 쉬어갈 숙소가 필요했고, 자동차로 이동하다 보니 주차가 되는 숙소가 필요했다. 'Super 8' 같은 곳이 대표적인 모텔 체인인데, 가격을 낮추기 위해 식당 대신 자판기를 두고, 각종 부대시설은 쏵 뺐다.


뭐, 각종 부대 시설을 다 뺐다는 점에서 우리나라 모텔도 마찬가지긴 하다. '오토모빌+'호텔'의 취지와 좀 무관하게, 다른 용도로 적극 활용되고 있는 것이 사실인데, 그러다 보니 나름의 독특한 특색들을 갖고 있다. 보통 침대 뿐 아니라 동그란 침대, 물침대, 도대체 용도를 파악하기 힘든 ㄷ자 모양의 침대도 있다. 침대 아래 발 닿는 부분을 쏙 빼서 의자처럼 쓸 수 있도록 만들어 놓은 거다. 3곳 중 1곳 정도는 매트리스에 비닐 커버를 씌워 놓는 것 같다. 빨간 등은 대체로 기본이고, 천장이나 벽면의 거울은 '옵션'이다. 


말하자면 이런 동그란 침대. 수건을 보니 '허니문 모텔'인데, 어디에 있는 건지 도저히 기억나지 않는다.

 
이따금 욕실 벽이 유리창으로 된 곳도 있는데, 불투명 유리지만 중간에는 투명 유리로 속이 들여다보이도록 한 곳들도 있다. 욕실에는 보통 샴푸와 보디샤워가 비치돼 있는데, 왜 항상 '샤르망'아니면 '차밍'인지 모르겠다. 같은 맥락에서, 모텔 냉장고에 들어 있는 음료수는 '화이브 미나'라든가 '박키스' 같은 짝퉁들이 많다. 생수도 곧잘 들어 있는데 이미 개봉돼 물만 담아놓은 것이 많다. 요즘은 정수기가 딸린 모텔도 많은데, 커피 믹스, 녹차 티백과 플라스틱 컵도 곧잘 비치돼 있다.  



허니문 모텔에 비치된 챠밍 샴푸.


그러나 아무래도 모텔의 압권은 그, 참을 수 없이 조잡한 가구들이라 하겠다. 로코코풍의, 화려한 화장대나 침대가 곧잘 있지만 장식이랄게 인형의 집 수준인데다, 서랍도 다 장식이어서 열리지 않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낭만적인 분위기를 내겠다고 핑크색으로 도배를 해 놓았지만, 참으로 키치적인, 한국의 모텔은, 아아 사랑스러워.


어쨌거나 그 '미국의 모텔'에서 가장 아름다운 것은 헌사. 
 
For all who have experienced 

lost reservations and bad directions,
lumpy matresses and broken ice machines,
burned-out light bulbs and those tiny bars of soap,
grimy towels, empty pools, paper-thin walls,
and forgotten wake-up call

딱 내 얘기다, 싶은 분들께

예약은 사라지고, '오시는 길'은 엉터리
침대는 쿨렁쿨렁 정수기는 역시 고장
불 안 오는 전구에, 쬐그만 비누 조각
너덜너덜한 타월, 텅 빈 수영장, 종잇장 같은 벽
그리고 절대 안 오는 모닝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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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땡땡 2010.12.03 16:44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정말 눈물 없인 읽을 수 없는 스토리네요. 아이고 배야. ㅋㅋㅋㅋ

  2. 딸기 2010.12.06 17:01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넘 재밌다.
    그런데 네 남편은 왜 모텔에 가자니? ㅋㅋㅋㅋㅋ

    http://ttalgi21.khan.kr/1796 이거 아니, 명랑모텔?
    http://ttalgi21.khan.kr/2196 요것도...
    http://ttalgi21.khan.kr/2199 요것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