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인트 호프에는 상업적 의미의 숙소랄 게 있었다
. ‘포경 선원의 집(Whaler's Inn)’은 매트리스가 가라앉기 시작하는 대학 기숙사 같은 방 한 칸을 당황스러운 가격에 내 줬다. 그러나 시스마레프 비상응급구조센터의 솜 터진 소파 위에서 사흘 밤을 보낸 나는 체크무늬 침대보만 보고도 감격했다. 노트북과 자명종 시계를 얌전히 책상 위에 놓고, 오리털 파카도 탁탁 털어 옷걸이에 걸었다. 종종 찾아오는 북극 연구자들을 위해 숙소를 열었다고 했는데, 이날은 다른 투숙객이 없어 보였다.

식당은 몇 년째 휴업 중이었다. 벽에 붙은 메뉴판을 보니 햄버거, 감자튀김, 스파게티와 피자를 어이없는 가격에 팔고 있었다. 바로 옆방이 부엌인 것을 모르고 찾아오는 순진한 손님에게 뽕을 뽑겠다는 자세라 하겠다. 바퀴 달린 이동식 책장에는 읽고 돌려주세요라는 쪽지가 붙은 페이퍼백이 수십 권 꽂혀 있었다. 우리 북극 연구자들께서는 빨간 책들을 읽으며 긴긴 백야의 밤들을 견디셨나보다. ‘장밋빛 모텔에서의 하룻밤’ ‘네 이웃의 아내를 탐하지 말라등등의, 어김없이 몹시 괴로워하는 남녀의 모습을 표지로 한 책들이 꽂혀 있었다. 그러고보니 놈 공항에도 이런 책들이 잔뜩 꽂힌 한권에 1달러간이 책 대여점이 있었다. 베링해 부녀자 조합에서 운영하는데, 빨간 책 대여하고 받은 돈으로 (부조리하게도) 불우 여성과 어린이들을 돕는다고 했다.

포인트 호프 는 알래스카 북단
, 북위
68.3도의 에스키모 마을이다. 이누피아트 에스키모 900여명이 산다나는 시스마레프와 마찬가지로, 기후변화 취재를 온 길이었다. 이글루가 녹아내리고, 에스키모도 반팔을 입고, 냉장고까지 사는 난감한 상황에 처했다 등등을 취재할 예정이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에스키모는 더 이상 이글루에 살지 않는다. 집 안에서는 다들 반팔을 입는다. 냉장고는 물론, 파는 줄만 알았다면 김치 냉장고라도 사들였을 것이다. 다만, 북극고래는 줄어들고 있었다. 포인트호프 앞바다인 추크치해는 북극고래와 벨루가 고래의 회유경로다. 수천년 동안 고래를 먹고 살아온 포인트호프 사람들은 고래가 예전 같지 않다고 했다. 지구 온난화와 북극해의 석유 시추로 고래의 생태가 교란되고 있다는 것이다. 숙소 로비에서는 알래스카 북극권 원주민 연합쯤 되는 티키각 코포레이션이 근처 광산에서 일할 계약직 노동자를 모집하고 있었다. 풍채 당당한 에스키모 아줌마 한 명이 어눌한 말투로 물어보는 중이었다.

혹시, 여기 고래뼈 보려면 어디로 가야 하나요?”
신청서를 쓰다 말고 아줌마가 나를 쳐다봤다. 시청 앞에서 덕수궁 어디 있냐고 물어보는 사람을 봤다는 얼굴이었다.
...여기, 저기.”
걸어갈 만 한가요?”
시스마레프에서 학습한 나는 영리하게도 이제, 버스나 택시가 있느냐고 물어보지 않았다. 당연히 그런 것 없다. 아줌마가 다시 나를 쳐다봤다.
...그러고 싶으면...”
그녀는 목운동을 하는 것처럼 고개를 갸웃거렸다.
, 기름값만 내 준다면 내가 태워다 줄 수도... 소변 검사 좀 하고...”
일자리를 얻으려면 마약을 하지 않았다는 것을 소변 검사로 증명해야 한다고 했다. 에스키모 사회에서 마약이 만연해 있어서. 티키칵 코포레이션 직원이 어깨를 으쓱했다.

에드나 아퉁아나-그녀의 이름이다-4륜 오토바이 뒷좌석에서 나는 왜 그녀가 고래뼈를 보여주세요에 당혹해 했는지 알게 됐다. 고래 뼈가 천지였다. 고래 뼈는 발받침처럼 현관에 놓여 있고, 고래 수염은 재활용 쓰레기처럼 마당에 얌전히 놓여 있었다. 마을 입구에는 지난해 잡은 고래의 뼈가, 산까지는 못돼도 언덕처럼은 쌓여 있었다. 에드나는 이 따위는 고래 뼈도 아니라는 듯 묵묵히 앞만 보고 달렸다. 오토바이가 멈춘 곳은 묘지였다. 수백, 수천 개의 고래 갈비뼈가 무덤을 둘러싸고 있었다. 고래 뼈도 십자가처럼, 십자가도 고래 뼈처럼 보였다.


(고래의 갈비뼈가 나무기둥처럼 세워져 있는 포인트 호프 마을 묘지입니다)

감격을 추스르지도 못했는데, 에드나는 오토바이의 시동을 걸었다. 눈이 쌓인 바닷가였다. 분홍색 고래 살점이 사과상자 크기로 잘라져 흩어져 있었다. 옆에서는 에스키모 할머니 한 명이 턱수염물범의 가죽을, 책에서나 보던 반달 모양의 에스키모 칼 울루로 벗겨내고 있었다. “, 뼈는 벌써 치웠나보네. 자 타!” 에드나는 충격과 흥분 속에서 눈을 떼지 못하는 나를 질질 끌어 뒷좌석에 앉혔다. 잠시 뒤 우리가 멈춘 곳은 옛 거주지, 올드 타운 사이트였다.

우리는 에스키모가 이글루에 사는 줄 안다
. 아니다. 지금은 조립식 주택에 살고, 예전엔 땅속에 살았다. 바람이 너무 거센데다, 나무 한 그루 없어 땅 위에 집을 지을 수 없기 때문이었다. 땅굴에 카리부의 가죽을 문 삼아 단 소드 하우스가 알래스카 에스키모의 전형적 가옥이다. 이글루는 사냥이나 여행 때 후딱 지어 쓰는 임시 숙소였다. 일종의 텐트라 하겠다. 에드나는 소드 하우스의 입구를 가리켰다. 고래 뼈가 기둥 대신 지붕을 받치고 있었다. 포인트 호프 주민들은 1970년대 소드 하우스를 버리고 현재의 조립식 주택 단지로 이주했다.

(알래스카 에스키모의 전통 가옥입니다. 여기가 입구. 못 박혀 있는 기둥은 고래 뼈에요.)

마을에 돌아오자 에드나가 친절하게 저녁이나 먹고 가라며 아무 집에나 불쑥 들어갔다. 주름이 잔뜩 잡힌 할머니가 아는 척도 하지 않고 부엌에 백조 수프 끓여놨으니 먹어라고 말한 뒤 다시 텔레비전으로 시선을 고정했다. 우리 집에도 없는, 40인치는 넘어 보이는 최신형 완전 평면 TV였다. 아이들은 소파에서 뒹굴며 닌텐도와 플레이스테이션을 주먹으로 부수고 있었다. 현관에는 털부츠 대신 구멍 숭숭 뚫린 크록스 슬리퍼가 뒹굴었다. 맙소사, 세계는 하나가 아닌가. 여자 아이 하나가 스프링처럼 튀어 나와 부엌으로 달려가더니 수프 한 그릇을 담아 내밀었다. 마사키, 내 또래의 일본 여자였다. 나는 에드나와 마사키 사이에 끼어 수프를 마시고 고기를 뜯었다. 자꾸만 이 새가, 멸종위기야생동식물 2급종인 희귀 조류라는 사실이 생각났다. 입 안에 돌처럼 뭐가 씹혔다. 비비탄이었다. “, 그거 많아. 엊그제 그걸로 잡았거든.”

아무도 내가 어디서
, , 무엇을 하려고 왔는지 아무도 묻지도 따지지도 않았다. 백조 수프가 바닥이 보이자 마사키가 재킷을 들고 일어섰다. 내 옷이었다. , 내 오...을 채 발음하지 못하고 나는 마사키를 따라 길 건너 집으로 들어갔다. 얼떨결에 또 수프를 한 그릇 얻어먹었다. 반 쯤 먹다 물어보니 벨루가 수프라고 했다. 벨루가는 북극권에 서식하는 흰돌고래다. 기분이 늘 좋은 것은 아니겠지만, 하여간 눈을 동그랗게 뜨고 웃는 얼굴을 하고 있다. 북극곰과 나는 벨루가를 보러 캐나다 밴쿠버의 아쿠아리움을 찾아간 적이 있었다. 그 방긋 웃는 벨루가를 한 점 한 점 떠 넣으려니 저절로 목이 메었다.

(방긋 웃는 벨루가 고래의 얼굴 @인터넷에서 펌)

식탁에 에스키모치고는 참으로 일본 사람처럼 생겼다 싶은 남자가 한 명 있었는데, 정말 일본인이었다
. 벨루가 수프의 바닥이 보이자 이번엔 그 일본인 신고가 내 옷자락을 잡고 옆집으로 들어갔다. 얼떨결에 이번엔 고래 고기였다. 껍질과 지방을 물에 삶은 마크탁, 에스키모들이 그렇게 좋아한다는 요리다. 지난해 잡은 북극고래라고 했다. 내 평생 이렇게 짧은 시간이 이토록 많은 멸종위기종을 먹어치우기는 처음이었다.

마크탁은 꼭 수육 같았다
. 소금을 쳐서 먹다 보니 김치 생각이 났다. 집주인이 미안해했다. “김치는 마침 없어. 마크탁과 김치가 딱인데, 그치?” 근처 대도시인 배로우에 한국인 상점이 있어 종종 김치를 사 온단다. 북극 에스키모 마을까지 진출한 한식의 우수성을 자랑스러워해야 할 지, 북극 에스키모 마을까지 집어삼키고 있는 세계화의 위력을 경계해야 할 지 난감한 심정이었다. 새벽 4시인데도 창밖이 늦은 오후처럼 환했다. 에스키모 어린이들에게 새벽 4시는 잠자리에 들기엔 너무 이른 시간. 얼떨결에 이번엔 그 틈에 끼어 농구도 하고, 뜀박질도 하고, 산책도 하고, 도요새 목에 끈을 감아 괴롭히는 아이들을 준엄하게 꾸짖기도 했다. 숙소로 돌아가니 아침 7시였는데, 해가 떴던 것 같기도, 뜨지 않았던 것 같기도 하다.

에스키모 VS 이누이트
지난번에 이 글을 <주간경향>에 싣고 나서 모처럼 독자들로부터 거센 항의를 받았다. 에스키모가 아니라 '이누이트'가 정치적으로 올바른 표현이라며, 똑바로 알고 써라, 그런 취지였다. 에스키모는 '날고기를 먹는 사람'이란 뜻이고, '이누이트'는 그들의 말로 '사람'이란 뜻이다.

맞다. 캐나다 북부와 그린란드의 원주민들은 '에스키모'를 경멸적인 표현으로 여기고, 스스로를 '이누이트'라고 부른다 (캐나다 북부의 준주 '누나버트'는 그들의 말로 '우리의 땅'이다). 그러나 알래스카 원주민들은 스스로를 '에스키모'라고 부른다. 처음 시스마레프 원주민 마을에 도착해서 '이누이트'라고 부르면 되냐고 했을 때, 그들은 벙찐 표정으로 '에스키모를 에스키모라고 부르지 뭐라고 부르냐'고 오히려 되물었다. 그들은 '에스키모'라는 단어에 대해 특별히 정치적/문화적인 맥락을 부여하지 않고, '이누이트'라는 단어가 존재하지 않는다. 그래서 이 여행기에서는 알래스카 원주민들은 '에스키모'로, 캐나다/그린란드 원주민은 '이누이트'로 부르기로 정했다.

Posted by orca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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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쏘댕기자 2011.06.13 11:42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으음, 일식을 줬으면 더 좋아했을 최망.

  2. Ray 2011.06.16 18:16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오랜만에 와서 글 잘 읽고 갑니다^^
    최기자님 트위터 있길래 팔로우했어요 ㅋ
    새글 올라오면 꼭 트윗해주세요 ㅋ

  3. 비톤 2011.07.08 16:14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좋은 포스트 잘 보고 갑니다.



포인트호프에서의 사흘을 나는 그렇게 빈둥거렸다. 동네 사람들은 언제부터 나를 알았다고, 길거리에서 마주치면 눈웃음을 치며 손을 흔들었다. 둘쨋날부터는 나도 따라했다. 남의 집 식탁을 싹슬이하고 소파와 텔레비전 중간에서 뒹굴다 시시콜콜한 동네 소문들도 주워들었다. 벨루가 고래 수프를 끓여준 엠마 키니바크는 페어뱅크스로 유학까지 다녀온 똑똑이지만 백혈병에 걸려 고향 마을로 돌아와 공무원으로 있다든가, 고래 고기를 잘라 준 팝시와 에바 키니바크가 포인트호프의 복음화에 앞장서는 독실한 기독교인이라든가, 일본인 청년 신고가 15년 째 여름마다 포인트호프를 찾아온다는 등이었다. 에스키모가 되고 싶던 이 말 없는 소년은 어느 날 무작정 포인트호프로 찾아와 바닷가에 텐트를 쳤단다. 동네 사람들이 그날 밤 손짓 발짓으로 이러다 북극곰에게 잡혀 먹힌다며 마을로 데려와 귀한 생명 하나 구했다고 한다.


하루는 마을 외곽 고래뼈 무덤에 앉아서 징징 짜는 비행 청소년 상담도 해 줬다
. 조카를 봐 주러 오빠네 갔는데, 오빠가 배고프냐고 물어보지 않았다는, 나로서는 이해하기 힘든 일이, 그의 고민이었다. 포인트호프에서는 누구든 다른 사람의 집에 들어가 냉장고 문을 열고 먹고 마실 권리가 있다. “안녕하세요대신 배고프지 않니?”가 인사다. 틈틈이 일도 했다. 레게머리에 검정 선글라스를 낀 양아치포스의 부족장 잭 세이퍼를 만났고, 인디언과 에스키모의 혼혈인 시 정부 공무원 릴리 투츨루유크를 인터뷰했으며, 전현직 고래잡이 선장들을 만나 지구 온난화로 겪는 고충에 귀를 기울였다. 결코 이 글이 나를 출장 보낸 매체에 실리기 때문에 하는 이야기가 아니다!

(포인트호프 부족장 잭 셰이퍼. 한 때 좀 놀아보신 포스다)

포인트호프의 고래가 줄어드는 것은 사실이었다. 포인트호프가 국제포경위원회(IWC)로부터 받은 북극고래 포획 쿼터는 한 해 10마리다. 한 때 3만마리가 드넓은 북극해를 헤엄쳤지만, 이제는 7000~9000마리밖에 남지 않았다. (그나마 한 마리는 엊그제 내가 먹었다.) 원주민 생존 포경이 허용된 알래스카에서도 세인트로렌스섬에서 카크토비크까지 10개 마을에서만 북극고래를 잡을 수 있다. 포인트호프에서는 고래가 얼음의 갈라진 틈으로 숨을 뿜으며 북상하는 늦은 봄 고래 사냥을 한다. 해빙이 얼어붙으면 너무 이르고, 녹으면 너무 늦다. 그러나 지구 온난화로 얼음이 녹는 시기가 빨라지면서 고래잡이 시즌은 짧아지고 있다. 올해는 2마리, 지난해에는 3마리를 잡았다. 루크 크누크가 고래잡이 선장을 하던 1970년대만 해도, 못해도 한해 예닐곱 마리는 거뜬히 잡았다고 한다. 여든 살의 루크는 포인트 호프 최고령 고래잡이 선장이었다.


루크는 포인트호프의 소년이면 누구나 그랬듯 열세 살부터 고랫배를 탔다
. 고래잡이는 그들이 가혹한 북극에서 살아남는 생존 방식이었다. 젊고 힘깨나 쓰는 장정 30여명이 고랫배의 선장을 맡았고, 배마다 10여명의 선원이 따라붙었다. 여자들은 봄이 오기를 기다리며 우미아크를 수선했다. 물범의 가죽 예닐곱 장을 붙여 만드는 고래잡이 보트다. 나무배는 빙산과 충돌하면 그대로 박살나지만, 우미아크는 급한 대로 재빨리 꿰매 쓸 수 있다. 고래잡이 시즌이 되면 마을 전체가 흥성거렸다. 남자들은 작살과 노를 손에 들고 바다로 나갔고, 여자들은 바닷가에 텐트를 치고 스토브에 물을 끓였다. 지난해 잡은 고래는 이미 바닥이 났고, 새알을 줍고 열매를 따기엔 이른 계절이었다. 먹을 것이라고 해 봐야 차와 비스킷이 전부였다.
 
지금은 집에서 스파게티를 삶고 도넛을 데워 스노머신에 실어 배로 보낸다. 예전처럼 목숨을 걸고 작살을 던지는 대신, 총을 쏘아 잡는다. 사람들은 더 이상 카리부 가죽으로 만든 파키나, 울버린 털로 만든 부츠, 마클락을 신지 않는다. 고래 뼈와 카리부 가죽으로 지탱한 땅속 집에서 나고 자란 루크는 조립식 주택의 거실에 앉아 인터넷으로 미국 본토의 손자들을 만난다. 인생은 너무, 쉬워졌다. 그의 한 평생 동안 모든 것이 변했다. 변하지 않은 것은 예나 지금이나 그의 옆에 앉아 있는 부인 앤지 뿐이다. 부모를 잃고 친척에게 입양돼 포인트호프로 온 소녀는 에스키모 언어 이누피아크를 말하지 못해 외톨이가 돼 울고 있었다. “그 때 루크가 나를 알아봐줬지. 조숙한 소년이었어. 나는 아홉 살, 루크는 열두 살. 우리는 좋은 친구가 됐고, 스무 살이 되던 해에 결혼했어.”

(할머니가 만들어준 전통 파키를 입고 활짝 웃는 설정의 에스키모 소녀)

팝시 키니바크는 처음 고래를 잡았던 그 날을 아직도 기억한다. “-어지게 좋았지. 동네 사람들이 우리 집에 쳐들어와 아무거나 다 벗겨 가는데, 그래도 그냥 좋더라고.” 고래잡이 선장이 첫 고래를 잡은 날 하루는 동네 노인들이 선장의 집에 와 무엇이든 집어갈 수 있다. 새로 장만한 혼다(4륜 바이크), 울버린 모피 코트도, 심지어 우미아크의 가죽까지 벗겨갔지만, 팝시는 그저 좋기만 했단다. 고래가 도착하면 동네 사람 모두가 모여들어 23일 횃불을 밝히고 고래를 처리한다. 동네 개들도 좋아서 날뛰는 때다. 컷팅의 영광은 작살수의 몫이다. 선장과 선원들이 가장 좋은 부위를 갖고, 고래잡이에 참여하지 않은 사람들에게도 조금씩 몫을 떼어 준다. 고래는 마을 사람 모두의 것이기 때문이다. 에스키모들은 고래가 잡힌것이 아니라 잡혀준것이라고 믿는다. 바다에도 신이 있다면 그것은 고래의 모습을 하고 있을 것이다. 팝시는 내게 죽은 고래의 눈을 본 적이 있느냐고 물었다. 설마, 그랬을 리가. 그는 눈을 가늘게 뜨고 말했다. -쓰풀, 베리 피-쓰풀.


콧수염을 길러 에스키모보다는 중앙아시아의 부족장처럼 보이는 팝시는 포인트호프에서도 알아주는 동네 유지였다
. 조립식 주택이지만 서울의 34평 아파트보다 큰 집에서 없는 것 없이 산다. 선물이라고 파인애플을 내밀었는데, 바나나를 넣고 구운 케이크를 잘라 주는 바람에 민망했다. 냉장고에는 가족 여행으로 다녀온 하와이 워터파크 사진이 붙어 있다. 그러면서도 그들은 여전히 고래를 잡고, 겨울이 되면 전통춤을 연습해 페어뱅크스에서 열리는 에스키모 올림픽에 나간다. 에바 키니바크는 세상에 별 일도 다 있다는 말투로, “신고가 일본에서 처음 왔을 때 보니 음식을 숨기고 먹더라고. 우리가 에스키모 문화를 가르쳐야 했어. 눈을 마주치면 인사하는 법, 음식을 함께 나눠 먹는 법, 그런 거 말야라고 했다. 나는 귀를 의심했다. 북극의 조그만 마을에서 고래를 잡아먹고 사는 사람들이 세계 최고의 경제대국 일본, 그것도 도쿄진에게 미개하다고 훈계하는 것이었다. 신고는 멋쩍은 웃음만 짓고 있었다. 포인트호프의 그들처럼 자부심과 자존감이 드높은 원주민 집단을 그 전에도, 그 후에도 나는 본 적이 없다.


(마을 외곽의 고래뼈 무덤에서 비행하고 있는 청소년들. 둘은 '보이'와 '프렌드'사이다)

그러나 알래스카의 여느 원주민 마을처럼 포인트호프도 높은 청소년 자살율과 마약 문제를 겪고 있다. 원주민 차별, 낮은 교육 기회, 취업의 어려움 등 세상의 벽 앞에서 미래가 없는 아이들은 자살을 택한다. 청소년 혼전 임신률도 높다. 고래 뼈 무덤에서 만난 틸리는 열 세 살인데, 형제가 10명이 넘는 것까지는 맞는데, 몇 명인지는 정확하게 모른다고 했다. 아빠는 세 번 이혼했고, 엄마는 지금까지 결혼한 적이 없다. 아홉 살 난 에이미는 사탕을 빨면서 태연하게 내가 두 살 때 언니가 술 취해서 가스 중독 비슷한 걸로 죽었다고 말해 나를 당혹케 했다. 혼전 임신으로 태어난 아이들은 가족과 친척들이 입양해 거둬 키우고 있었다. 30년 뒤에도 고래는 여전히 이들의 운명일까. 내 수첩의 마지막 페이지는 이런 환경에서 정상적으로 자랄 수 있는 아이는 사실상, 거의 없어 보인다로 끝나고 있었다.

공항에는 비릿한 고래 비린내가 안개처럼 깔려 있었다. 비행기 프로펠러 아래서 조종사가 출석을 불렀다. “...묭아이초이? 몸무게는요?” 비행기가 작아 무게 균형을 맞춰야 하기 때문이다. 좌석도 시키는 대로 앉아야 한다. 뒷좌석 사람이 어깨를 쳤다. 팝시 키니바크의 아내, 에바였다.
가는 거야?”
, .”
다음에 칼르기 때 다시 와. 6월에 하는 고래축제인데, 그 때는 정말 볼만하다우. 참 그런데...”
에바가 귓속말이라도 하듯 몸을 붙여왔다.
“‘
라는 설교자가 있지 않나? 미국 한인 방송에서 봤는데...정말 복음이 가득하신 분이더라고. 한국 가면 꼭 한번 이야기 해 줘요. 여기 북극 에스키모들이 설교해 주십사 한다고.”
순복음교회 조용기 목사님, 알래스카 에스키모의 성도들께도 복음의 은총을 꼭 한번 부탁드립니다.


Posted by orca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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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지나가는과객 2012.07.06 10:58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너무 재밌게 보고 있습니다^^ 감사합니다. 3년전에 저도 알래스카 다녀왔습니다. 렌트해서 달튼 하이웨이 따라 데드호스 다녀왔는데, 가는길의 풍광을 잊을수가 없네요. 전에 어느 신문기사에서 본것같은데 북극곰님은 한겨레 기자가 아니신지요?

  2. jhdh 2012.12.07 16:29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노아 방주 발견 뉴스 보시러 오세요. 성탄절 맞아 츄리도 예쁘게 했습니다. 그럼




(울산 장생포 가는 길 어느 공장 담벼락. 장생포초등학교 어린이들의 그림으로 벽화를 만들었다.)


불길한 영화의 시작처럼 이야기하자면, 그 하루가 그렇게 길 줄 알았더라면 아예 떠나지도 않았을 것이다. 아침부터 어딘가 이상했다. 고래 목시조사 배를 태워주겠다던 울산시청 박선생님은 전날 밤 전화통화에서, 아침 9시30분까지 장생포 냉동창고 뒤로 오라, 고 말한 뒤 전화를 끊었다. 정류장을 놓쳐 직업훈련소 종점까지 갔다가 터덜터덜 냉동창고로 향하는 길. 마침 갓길도 없어 차도의 흰 선을 밟으며 걸어야 했다. 찬바람 부는 냉동창고 앞에는, 배 한척 뿐 아무것도,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 혹시 나 속은 거 아닐까. 이 배에 그대로 실려 새우잡이로 팔려가는 거 아닐까. 전화를 할까 말까. 5분만 더 기다려 볼까. 제자리에서 신발로 땅바닥을 쿡쿡 차며 동그라미 맴돌기를 10여분, 저쪽 가건물에서 손 흔드는 사람이 보였다. "배 타시기로 하신 분이시지요?"


정말 작은 배였다. 선장과 선원 2명, 박선생님, 그리고 나였다. 닻을 올리고, 줄을 감고, 시동을 걸고, 배는 천천히 장생포 미포산업단지를 빠져나가기 시작했다. 바다는 '장판' 처럼 평온했다. 감당할 수 없을 만큼 멀미가 쏟아진다기에 어젯밤 급히 사다 붙인 멀미약 자리가 괜히 머쓱할 정도였다. 좁은 만을 빠져나가자, 박 선생님은 의자를 세워 놓은 선실 위로 담요를 감고 올라갔다. 고래가 보이는지, 얼마나 보이는지, 어디서 보이는지를 알아보기 위해서 울산시청이 매주 실시하는 목시조사다. 파도가 몹시 거칠지만 않으면 매주 꾸역꾸역 나간다. 먼 바다에서 고래를 분간할 능력도 없고, 6인용 탁자 하나가 겨우 들어갈 선실에 일없이 앉아 있으니, 괜히 미안한 기분이었다.



(뻘쭘하게 앉아있는 접니다)

고래는, 소리없이 찾아왔다. 갑자기 배가 천천히 속도를 늦추기 시작했다. 바다 저 끝에 갈매기들이 무리를 지어 맴돌고 있었다. 그 아래 거뭇거뭇한 것이, 고래였다. 고래는 물고기를 쫓고, 고래가 먹고 남긴 물고기 부산물을 먹으러 새들이 모여든다. 새 떼 만큼이나 고래도 적지 않아 보였다. 조금씩 가까워지면서, 그림자 같던 그것들은, 물 위로 펄쩍 펄쩍 뛰어 올랐다. 참돌고래였다. 한 두 마리가 아니었다. 세마리도 아니었다. 바다의 이쪽 끝에서, 저쪽 끝까지, 참돌고래 떼가 덮고 있었다. 박선생님이 갑판으로 나오며 말했다. "운 좋네요, 오늘. 올해 들어서 처음 봅니다, 이렇게 많은 건." 


며칠 전 만난 정일근 시인이, 이야기를 하다 말고 물어본 적이 있었다. 고래 본 적 있어요? 아, 네. 얼마나 봤어요? 뭐 밍크도 좀 보고, 파일럿 고래도 본 적 있고, 오르카처럼 생긴 고래도 멀리서 보고, 또... 정시인이 내 말을 가로막았다. 나는, 대한민국에서 고래를 가장 많이 본 사람이에요. 울산 앞에 가면, 돌고래 떼가 수평선 저 끝까지 가득찰 때가 있어요. 수천, 수만마리에요. 고래 한가운데에 내가 있어요. 시간이 딱 정지하고, 고래하고 나만 있어요. 그 감동을, 나는 말로 다 못해요. 고래 보러 가세요. 봐야 압니다.




(똑딱이 디카로 찍은 넘실거리는 고래떼 동영상. 이거 올리려고 지금, 동영상편집기 다운받아 첨 편집(=잘라내기)해 올려봅니다 ㅠㅜ)


수평선의 서쪽 끝에서 동쪽 끝까지, 남쪽 끝에서 북쪽 끝까지, 고래와 나 밖에 없었다. 고래들은 배를 무서워도 않고, 손을 뻗으면 닿을 거리에서 펄쩍 펄쩍 뛰어 올랐다. 배가 하얀 낫돌고래들은 카메라를 아는지 모르는지, 뱃전으로 다가와 앞서거니 뒷서거니 달리고 또 뛰어올랐다. 카메라의 메모리는 금세 차 깜빡깜빡 빨간 불이 들어왔다. 지우고 찍고, 또 지우고 찍었다. 고래생태관광 가이드라인에는, 고래를 쫓아가지 마라, 고래 뒤에서 접근하지 마라, 피할 거리를 남겨둬라, 속도를 내지 마라, 같은 말들이 나오지만, 지킬 수도 없었다. 뒤로도 고래, 앞으로도 고래, 옆으로도 고래 떼였다. 



(뱃전에서 만져질 듯 가까이 다가오는 돌고래. 네, 가이드라인 따위는 완전 망각했다는 ㅠㅜ)


"관광선에 연락해 줘야지? 요새 못 봤대는데" 선장은 통신 연락망으로 고래바다여행선에, 여기 고래 있으니 관광객 태워서 오라, 고 연락을 보냈다. 울산시 남구청이 주말마다 고래관광선을 운영하는데, 한동안 고래가 보이지 않아 허탕을 쳤다. 평일인데도, 관광선은 곧 출발하겠다고 연락이 왔다. 그 때까지 고래떼 잘 잡고 있으라는, 주문이었다. 고래는 GPS가 달려 있지 않아 위치를 확인할 수 없으나, 이 배는 찾을 수 있으니, 고래떼를 놓치지 말라는 것이었다. 그 순간이었다, 이 날의 끝나지 않는 항해가 시작된 것은. 


고래떼는 자꾸만 북으로, 북으로 이동했다. 우리도 따라서 북으로 방향을 잡았다. 조금만 한 눈을 팔면, 고래떼는 사라지고 없었다. 고래떼를 따라, 배는 잰걸음으로 달렸다. 장생포에서 1시간 거리에서 목시조사를 할 예정이었는데, 배는 자꾸만 북으로 북으로 향했다. 이러다 월북하지 싶었다. 3시간 안에 장생포항으로 돌아온다고 했는데, 이미 4시간은 훌쩍 넘긴 상태였다. 선장은 어디론가 또 통신을 날렸다. 


한 시간쯤 더 달렸을까. 저 멀리서 검은 점이 보였다. 밥 배였다. 또다른 어업 지도선이, 고래를 좇고 있는 이 배를 위해 국과 찌개를 실어 왔다. 뱃전에 신문지를 깔고 앉아 밥을 먹으면서, 선원들은 교대로 고래떼를 지켰다. 밥 배가 돌아가고도 한 시간이 지나서야, 저 멀리 관광선이 보였다. 손을 흔들 필요도 없이, 관광선은 고래떼를 향해 달렸다. 관광객들의 환호가, 들리지 않는데도 들리는 것 같았다. 나도 타 봐서 안다. 관광객들은 고래를 보고 환호를 지를 준비가 되어 있다. 그 전 주, 그림자처럼 지나가는 밍크의 지느러미를 보기 위해, 관광객들은 배가 기울만큼 밍크를 향해 달려왔다. 저 멀리 푸른 바다에 불량화소처럼 찍혀 있는 밍크의 등을 보고도 관광객들은, 감탄과 환호와 박수를 보냈다. 거기가, 생태관광의 희망과 가능성이 있는 지점이다. 



(고래관광여행선의 관광객들. 그다지 환호하지 않는 것처럼 보이지만 ^^; 환호하고 있습니다)


어쨌거나, 동해 한가운데서 이제 돌아갈 일만 남았다. 지금 달리면 터미널 가서 커피 한 잔 마시고 출발할 수 있다. 그러나 우리의 배는, 좀처럼 속도를 내지 못했다. 정신없이 고래떼를 좇던 어디쯤에선가, 밧줄이 스크류에 걸려 버린 모양이었다. 경운기처럼 털털거리면서 배는, 꾸역꾸역 서쪽으로 기수를 돌렸다. 이 대로라면 오늘 중으로 돌아가기도 어려워 보였다. 나는 다시 선실 안으로 들어갔다. 


파도에 넘실거리는 배의 진동은, 출근길 지하철 진동 만큼이나 규칙적이었다. 어느 순간 이미 졸고 있었다. 중간에 깨어 좀더 빠르다는 다른 배로 갈아타고, 다시 계속 졸았다. 내가 기자에 연구자인데, 무엇보다 이 배에 승선한 유일한 여성인데, 이렇게 머리를 기둥에 쳐박으며 졸아도 되는 것인가, 라는 자각이, 기둥에 머리를 박을 때마다 잠깐잠깐 들었으나 곧 사라졌다. 장생포에 도착할 즈음, 바다 건너편에 고래 해체장 자리가 있다는 말을 듣고 사진을 찍으려 애썼던 기억이 얼핏 난다. 


배가 냉동창고로 돌아온 것은 오후 5시. 땅에 발을 딛자 파도를 넘는 것처럼 넘실거리는 느낌이 들었다. 저 바다 한가운데에서, 조금 전 까지만 해도, 고래떼 속에 있었는데. 그것은 꿈이었을까. 카메라를 켰다. 찍혀 있다. 그럼 사실이었을까. 아니 꿈이었을까. 가슴이 콩콩 뛰는데, 코에서 비린내가 나는 것 같은데, 그럼 그건 사실이었을까. 



Posted by orca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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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쏘댕기자 2011.01.05 01:41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오밤중에 뱃가죽 부여잡고, 킄킄킄

  2. 갈매 2011.01.05 14:42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와~~ 너무너무 재밌다~~ㅎㅎ
    론리플래닛 보면 각 여행지에서 할 수 있는 여러가지 아웃도어활동이 나오잖아. bird watching, whale watching 등등. 미국있을때, 보스턴 앞바다에 가면 고래를 볼 수 있다는거야.
    새따윈 관심없지만, '세상에 고래라니!!고래를 볼 수 있다니.'
    큰 기대를 품고 밤버스를 타고 보스턴항에 갔지. 비가 내려 그날은 꽝, 다음날도 비, 마지막날은 흐렸는데 갔더니, 이런날은 고래가 안보인다나. 허탕치고 실패. 고래는 그렇게 사라져갔지.
    근데 멀리갈 것도 없었군. 울산앞바다에 가면 저리 많은 걸.
    왜 한국에선 고래보러 갈 생각을 못했을까? 이래서 에코투어리즘에 대한 인식의 전환이 필요한 거겠지?
    9시뉴스로만 보던 돌고래떼 영상을 이렇게 최멍블로그에서보니 감회가 새로우면서, 나도 가면 막 볼 수 있을 것 같은 그런 착각이 든다! 감동의 포스팅임.^^

    그래 이렇게 각종 기술을 익혀가는거야! 대견, 뿌듯하다! 최멍~ (내가 얼마나 뿌듯해하는지, 이 바쁜 와중에, 장문의 댓글을 남긴 걸보니 알 수 있겠지?)ㅋㅋ ~잘했다, 치타!

    • 갈매 2011.01.07 19:14  댓글주소  수정/삭제

      SNS의 세계는 넓고도 깊다는. 만날 새로운 용어가 나오고, 개념이 나오고.. 어려워어려워~~
      어서 감기가 낫길 바래~~

      고래보러 갈 때 나도 좀 데려가주라~~ ^^

  3. ㅇㅇㅇㅇㅇ 2011.03.13 10:12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안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