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세이는 링로드에서도 비포장길로 30킬로를 들어가야 나온다. 손가락까지는 못 돼도, 발가락처럼은 구불거리는 아이슬란드 동부 피요르드 해안선을 따라 백여 킬로를 달린 뒤, 다시 덜컹거리는 비포장 길로 끝까지 가면 거기 집 한 채가 있다. 농장업과 어업과 호스텔 숙박업을 동시에 하시는 농부 부부가 사신다. 내 오른손에 들려 있던 론리 플래닛가이드북은 친절한 호스텔을 방문할 게 아니라면 굳이 갈 필요가 없다라고, 왼손에 들려 있던 디스커버리가이드북은 참된 아이슬란드, 고독과 외로움의 대명사라고 쓰고 있었다.


문제는 북극곰의 손에 들려 있던 아이슬란드 호스텔 책자였다
. “30킬로 자갈길을 달려가면 호스텔 하나가 달랑 있을 뿐이다를 소리 내어 읽은 북극곰은 주먹을 불끈 쥐고 식탁을 쳤다. “가자!” 봉지 째 물에 넣고 끓여 간신히 고봉 모양으로 쌓아놓았던 푸슬푸슬한 밥이 푸스스, 무너졌다. 아아, 왜 어떤 사람들은 도전 정신과 청개구리 정신의 중간 어디쯤에 여행자 정신을 깃발처럼 매달아 놓은 것일까. 길이 없으면 무리해서 가고, 아무것도 볼게 없다면 굳이 애써 찾아간다. 부르네스 호스텔 아침 식탁에 놓여 있던 콜라며(드디어 샀다!) 물이며 밥이며를 주섬주섬 채 담기도 전에 자동차는 이미 부르릉거리고 있었다. 몹시 달리면 오후쯤엔 후세이에서 물범을 볼 수도 있을 것 같다.



(산과 들판이 맞닿은 곳이 뿌옇게 몽환적으로 흐려진, 후세이의 툰드라 평원. 아름답습니다)

후세이로 가는 무차선 비포장길에는 다른 차라고는 코빼기도 보이지 않았다
. 들판에서 놀고 있던 말과 양들이 같이 놀자며 따라왔다. 말들은 풀을 뜯다 말고 다가닥거리며 따라와 히힝 하고 콧김을 내뿜었다. 양들은 나 잡아 봐라며 도로 위로 떼를 지어 올라왔다. 입으로라도 빵빵, 소리를 내면 그제서야 마지못해 엉덩이를 뒤뚱거리며 풀밭으로 내려갔다. 아이슬란드 도로 표지판에 ‘90’(링 로드 규정 속도다) 다음으로 자주 나오는 게 양 조심’ ‘말 조심’ ‘순록 조심이 아닌가 싶다. 여기서부터는 자갈길이나 동네 시작’ ‘동네 끝도 자주 나온다. ‘어린이 보호구역비슷한 건데, 여기서부터 마을이 시작되니 속도를 줄이라는 거다. 그러나 단 두 명이 사는 후세이에는 동네 시작표지판도 없었다. 길은 끝났다. 수평선과 나란히 주인집, 호스텔, 창고 달랑 세 채. 바람이 냐하하하 옆구리에 손을 얹고 웃으며 지나갔다.


장갑을 채 벗지도 않고 튀어나온 주인 아주머니는 이방
, 저방, 요방, 즉 모든 방이 다 비었으니 아무데서나 자고 가라, 고 말한 뒤 바빠서 이만이라며 바람과 함께 사라졌다. 베란다에 유리를 씌워 만든 거실에서 인스턴트 커피와 딱딱하게 굳은 빵을 먹었다. 부엌에 주방용품은 있지만 음식을 살 곳은 아무데도 없다라더니, 역시. 새삼 1.5리터 콜라를 병째 사들고 다니길 잘했다고 으쓱해했다. 부엌 벽에는 농장 물품 팝니다리스트가 붙어 있었다. 물범 고기나, 농장에서 갓 짠 신선한 우유와 계란, 물범 가죽과 양털 같은 것들을 합리적인 가격에 판다. 직접 찍은 사진에 종이를 붙여 만든 엽서도 있었고, 손자 색연필과 크레용을 빼앗아 그린 듯한 자작버드와칭 가이드도 붙어 있었다. 분홍 꽃무늬가 작렬하는 복고풍 찻잔에 커피를 옮겨 담고 여유롭게 거실로 향했다. 대게 껍질에 실을 매달아 걸어 놓은, 매우 독특한 장식품이 걸려 있었다. 양털과, 그 양의 털로 짠 듯한 노르딕 스웨터와, 아저씨가 직접 잡아서 말렸다는 물범 가죽과, 순록의...두개골이 여기저기 널려 있었다.



(거실에 덧대 만든 베란다에요. 게에 실을 매달아 놓은 독특한 모빌도...)


오후에는 카메라를 메고 물범을 보러 갔다
. 여름 한 철 얼음이 풀린 툰드라의 들판은 디딜 때마다 폭신폭신했다. 우레탄 조깅 코스보다 밟는 느낌이 좋아 깡충깡충 뛰고 싶었지만 애써 참았다. 툰드라 식물들이 그 열악한 환경에서 간신히 살아 남아 여름 한 철 살아보겠다고 꽃 피우고 번식하는데, 그걸 꺾거나 짓밟으면 안 된다고, 예전에 리얼 북극 스발바르에서 배웠다. ‘개념있게 앞 사람 발자국을 그대로 밟아 가려고 했지만, 인적은 까마득히 없었고 바닥엔 트랙터 자국만 패어 있었다. 산과 들판, 하늘과 바다. 경계가 만나는 지역은 알 수 없는 기상현상으로 뿌옇게 흐려져 몽환적이었다. 들판의 끝에 도착하자 검은 모래 해변과, 푸른 하늘이 거울처럼 비치는 얇은 내해, 라군이 나타났다. 물고기 세 마리를 잡아서 까만 비닐봉지에 넣어 들고 오던 주인 아저씨가, 너희는 누구냐고 묻지도 않고 저 쪽 코너 모퉁이 풀밭이나 저 위 강변 모래톱에 가만히 앉아 있으면 물범이 나온다고 알려주었다.


혹시 발자국 소리에 도망갈까 봐 까치발로 살금살금 다가갔다
. 물범들은 얕은 라군과 모래톱 위에 한껏 요염한 자세로 누워 있었다. 모로 누워 머리와 다리를 틀어올리고 양 발을 엇갈리게 꼬았다. 고리무니 점이 있는 점박이 물범, 선물 묶은 것처럼 목에 하얀 띠가 둘러진 후드 물범, 둘이 섞여 있는 잡종 물범...모두 열 여덟 마리였다. 강물에 막혀 다가갈 수 없는 우리는, 해치지 않을 테니 건너 오라고, 손짓 발짓에 하트도 그려 보였다. 그러나 물범들은 콧방귀도 뀌지 않았다. 이게 다, 예전에 북극곰이 알래스카 출장길에서 자신들의 동료 물범을 사냥했다는 사실이 빠른 속도로 전세계 물범 커뮤니티에 전해졌기 때문이다. 오라는 물범은 오지 않고, 머리 위로 그 사납다는 스쿠아가 꽥꽥 소리를 지르며 날아갔다. 펭귄 둥지를 지켜 주고 그 대가로 알을 뜯어 먹는다는 조폭 도둑갈매기다.



(어디가 하늘이고 어디가 물인지, 구분되지 않는 이 풍경이 좋습니다. 저 끝에서 물범이 고개를 내밀었다 말았다 했는데.)

후세이와 그 주변 지역엔
2000마리의 물범이 산다. 아이슬란드 전체 물범의 15%. 그러나 세계 많은 곳과 마찬가지로 이 물범들도 서식지를 잃을 위기에 처해 있다. 미국계 다국적 알루미늄 업체 알코아사가 물범 서식지 상류에 수력 발전용 댐을 짓는 카란유카르 프로젝트를 진행하고 있다. 알루미늄 제련에 쓸 전기를 공급하기 위해서다. 알코아사는 댐 건설로 1000개의 일자리를 창출하고, 공사용 도로가 놓여 관광객이 찾아오면서 지역 발전이 도모된다고 주장하고 있다 (어디서 많이 들어본 것 같은 이야기다).

후세이로 오는 길에
레이다피요르드라는 마을을 지나쳤는데, 거기가 대표적인 수혜 지역이다. 5년 전만 해도 700명이던 인구가 알루미늄 제련 공장이 들어서면서 2000명으로 늘었다고 한다. 그렇잖아도 아이슬란드에서 가장 낙후한 동부 피요르드 지역 주민들은 이 댐 건설을 지역 경제 발전의 기회로 보고 찬성하고 있다 (역시 많이 듣던 이야기다). 그러나 댐이 건설되면 강 주변 57가 물에 잠긴다. 강에 한 발을 담그고 살아가는 순록, 분홍발 기러기, 물범 서식지가 모두 물에 잠긴다 (이것도 역시 익숙한 이야기다). 아이슬란드의 대표적인 환경단체일 것으로 추정되는 아이슬란드 보호 협회, 그린피스, 세계야생동물보호기금은 이 댐 건설을 환경 재앙으로 보고 반대하고 있다. 가장 유명한 댐 반대 운동가가 가수 비요크의 엄마다. 이 아주머니는 2002년 열흘 넘게 댐 반대 단식 농성을 벌여 BBCCNN 뉴스에 나오기도 했다.



(아저씨 차가 아닐까 싶습니다. 빨간 배도 아저씨 배)

물범들의 안녕을 빌어주고 돌아오는데
, 길 끝에 아까는 보이지 않던 문이 있었다. 문은 쇠사슬로 칭칭 동여매 잠겨 있었다. 낮에는 보이지 않던 차들도 여기저기 나타났다. 농장에 왜 이렇게 많은 차가 필요하지? 해 저무는 거실에 앉아 다리를 흔들며 방명록을 설렁설렁 넘겨보다가 갑자기 몸이 굳어졌다. 이제 사흘째. 눈은 그칠 생각을 하지 않는다. 아직은 견딜 만하다’ ‘오늘은 종일 집 안에서 보드게임만 했다. 후세이는 정녕 고립을 느껴볼 수 있는 곳이다’ ‘하룻밤 머물 생각이었는데, 날씨가 나빠 나흘을 있다 간다 전세계 곳곳에서 거기 가면 아무것도 없다에 홀려 후세이를 찾은 관광객들은 며칠씩 고립된 끝에 간신히 이 곳을 탈출... 한 것으로 추정된다. 그 때 집 안을 한 바퀴 돌아보고 오던 북극곰이 풀죽은 목소리로 말했다. 문이 하나도 잠기지 않아.” 집 안은 미로 같았고 열리지 않는 정체불명의 문들이 많았다. 나도 아까부터 계속 마음에 걸렸던 걸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털어놨다. “아까 창밖으로 트레커 두 명이 보였는데, 갑자기 사라졌어.”


저 많은 폐차들은 혹시 관광객을 처치하고 차만 모아둔 게 아닐까
. 부엌 식탁에 노트북을 펼쳐 놓고 밝고 명랑하고 사랑스러운 영화 노팅힐을 틀었다. 그런데 자꾸만 영화 호스텔이 생각났다. 철 모르는 배낭여행자들이 외딴 곳의 아름다운 호스텔을 찾아 갔다가, 싸이코패스 주인에게 걸려 난도질당해 영원히 돌아오지 못하는 공포영화다. 그 많은 이방, 요방, 저방을 다 놔두고 우리는 창고 옆 방 이층침대의 일층에 나란히 앉아 이불을 뒤집어썼다. 한 가지 위안이 있다면, 이 농부 아주머니 아저씨가 너무 바빠서 우리를 처치할 시간이 없다는 것이었다. 그물 쳐 놓고 생선도 잡아야지, 물범 잡아 가죽도 벗겨야지, 닭알도 줍고 젖소 젖도 짜고 건초도 말리고, 틈틈이 털실로 옷도 짜야 하니까, 우리 따윈 신경 쓸 틈도 없을 거야. 비상용 손전등을 한 손에 움켜쥐고 까무룩이 잠이 들었나 싶었는데, 이날 밤 서쪽 하늘엔 초록색의 오로라가 떴다.




Posted by orca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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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skygirl 2011.02.09 02:52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아 여기도 오로라가 뜨는군요 정말 멋지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