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렌디피'티'와 오르카 서점이 어깨를 나란히 한 코르도바 시내의 모습)

북극곰은 우리가 코르도바로 가는 길에 고래를 볼 수도 있다고 했다. 바다사자는 확실히 볼 것이고, 해달 정도는 여기저기서 불쑥 나타날 것이라고 했다. 알래스카 위티어에서 코르도바로 가는 페리 안에서, 나는 포경선의 일등 항해사처럼 엄숙한 자세로 고래가 나타나는지 감시했다. 그러나 한 시간이 흐르고, 두 시간이 흐르고, 페리가 돌연 경로를 바꿔 발데즈에 들러 수학여행 온 학생들을 태우고 엉금엉금 코르도바로 가는 동안에도 고래는 나타나지 않았다. 탐조 망원경을 손에 들고 번갈아 불침번을 선 우리가 본 것은 부표 위에서 게으르게 일광욕하는 바다사자 두 마리가 전부였다


생각난 김에 말해두자면
, 바다사자는 물개와 비슷한 해양 포유류다. 물개보다 체격이 작고 영리해 동물원 물개 쇼에서 물개 대신 애쓰고 있다. 해달도 해양 포유류인데, 바다에 사는 수달이라 할 수 있다. 수달보다 얼굴이 동글동글하고 귀엽다. 일본 애니메이션 <보노보노>에 나오는 하늘색 보노보노가 바로 해달이다. 코르도바 페리 터미널에는 아니나 다를까 해달 두 마리가 배영 자세로 둥둥 떠 있었다. 뭘 몰래 훔쳐 먹다 딱 걸린 듯한 얼굴을 하고, 해달들은 사각사각 소리를 내며 생선을 먹었다. 이따금 우로 취침, 좌로 취침, 물 속으로 한바퀴씩 데구르르 구르기도 했다. 엄마 해달의 배 위에 누워 있던 아가 해달도 엄마와 함께 데구르르 굴렀다. 너무 귀여웠다



(아구작 아구작 생선 갉아먹는 소리를 내며 배영하는 해달들)

해달은 코르도바의 상징적 동물이다. 철원 독수리나 강화도 저어새, 천성산의 도룡뇽쯤 된다. 1989년 사상 최악의 기름 유출 사고가 코르도바를 덮쳤다. 지난해 멕시코만 기름 유출 사고가 사상 최악을 경신했으니, 이제는 사상 제 2의 사고쯤 되겠다. 알래스카 북극해의 기름을 미국 본토로 실어나르는 액손사의 유조선이 발데즈 앞바다에서 암초와 부딪쳤다. 마침 해류가 코르도바 방향으로 흘렀고, 피해는 코르도바가 몽땅 뒤집어썼다. 주민 대부분이 어부이거나 생선 통조림 공장 직원인 코르도바 주민들은 버선발, 장화발로 달려 나가 기름을 퍼 냈지만, 다가오는 검은 파도 앞에서는 속수무책이었다. 생선 찌꺼기나 좀 얻어먹을까 싶어 통조림 공장 주변에서 배회하던 해달들은 미처 피하지도 못한 채 기름을 뒤집어썼다. 귀여운 얼굴을 하고 기름에 전 채 죽어간 해달은 액손 발데즈 사건의 상징이 됐다. 바로 그 액손 발데즈 사건의 현장에, 한국의 저널리스트인 우리 두 사람은, 팔자 좋게도 여름 휴가를 온 길이었다.


우리는 코르도바에서 트레킹으로 시간을 보냈다
. 30층 아파트 높이에서 3분에 한 번 씩 우르르 쿵쾅 천둥 소리를 내며 무너지는 차일즈 빙하에 다가가 물수제비를 던지고, 도시락을 싸 들고 새들백 빙하로 피크닉도 갔다. 가지 끝마다 솜사탕 같은 이끼 뭉치를 매달고 있는 온대 우림의 나무들과 악수하며 걸어가다 보면 길 끝에 빙하와 호수가 나온다. 가이드북은 집채라고 했지만 실상은 개 집만한 빙산들이 호수에 떠 있었다. 빙하가 만들어 낸 호수의 가장자리에서 손수건을 깔고 앉아 우리는 샌드위치를 먹고 음악을 들었다. 그리고 떼를 지어 여행하는 나무들을 봤다. 알래스카 내륙 평원의 가문비나무들이 유콘 강을 따라 베링해로 흘러 들어갔다, 해류를 타고 남으로 내려와 쿠퍼 강 삼각주에서 마지막 가쁜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차일즈 빙하로 향하는 길은 그림엽서같이 아름답습니다)

여행하는 나무는 동물학자 윌리엄 프루이트가 쓴 알래스카 자연 에세이 와일드 하모니의 첫 장 제목이기도 하다. 그는 1960년대 포인트 호프 인근에서 진행되던 핵실험 계획, 채리엇 프로젝트의 환경영향평가 담당자였다. 핵실험이 연약한 북극의 생태계를 한번에 날려 버릴 수 있다는 고민 끝에 그는 양심선언을 했고, 원주민들의 대규모 핵실험 반대 시위로 이어져 결국 채리엇 프로젝트는 저지된다. 그러나 프루이트는 미국 본토 대학에서의 자리를 잃고 떠돌다 캐나다 매니토바에서 여생을 보내게 된다. 역시 알래스카에 몸과 영혼을 묻은 일본인 사진작가 호시노 미치오는 그를 기려 여행하는 나무라는 에세이를 썼다. 부지런히 전세계를 걸어 다니고 있는 도보여행가 김남희씨도 여행하는 나무라는 이름의 홈페이지를 갖고 싶다고 이야기한 적이 있다. 안타깝게도 travelingtree.com여행하는 나무에 매료된 누군가가 이미 사들이고 없다. 어쨌거나 나무들은 패키지로 여행하고 있었다. 외롭지 않아 보여 다행이었다

(이끼가 카펫트처럼 푹신하게 깔린 트레킹 길)

우리는 아침엔 킬러 웨일 카페에 가서 커피를 마시고, 저녁엔 피자집 암브로시아에 가서 스파게티를 먹었다. 굶지 않으려면 잽싸게 움직여야 했다. 카페는 오후 3시면 문을 닫고, 그나마 3개 있는 식당도 7시면 의자를 치운다. 킬러 웨일 카페 맞은편은 오르카 서점이었다. 킬러 웨일=오르카=범고래로, 범고래가 이 지역에서 꽤 인기있는 간판 이름임을 알 수 있다. 진짜 범고래는 마을 컬쳐 센터에 있다. 2000년 범고래 한 마리가 코르도바 앞바다로 밀려들었다가 결국 죽고 말았는데, 그 고래의 골격이 전시돼 있다. 내가 묵고 있는 비앤비 주인인 마크 킹 아저씨도 열심히 해체와 복원에 참여했다고, 전시물 안내에 적혀 있었다


코르도바는 액손 발데즈 사건을 겪으면서
, 우리나라 식으로 말하자면, ‘의식화가 됐다. 순한 어부들이던 주민들은 연어와 해달의 떼죽음을 목격했고, 장화를 신고 기름을 걷어 냈으며, 액손사를 상대로 길고 오랜 싸움에 들어갔다. 1993년엔 액손사의 배가 어민들의 해상 시위로 코르도바로 입항하지 못하고 발데즈로 돌아가기도 했다. 주민 상당수는 아직도 액손사와 소송 중이다. 컬처 센터 한 귀퉁이에는 토템폴을 패러디한 쉐임 폴 shale pole'을 전시하고 있었다. 액손사 부회장의 얼굴에서 기름이 잔뜩 뿜어져 나오는 모습을 거꾸로 새긴 조각이다. 알래스카 인디언 하이다 부족은 저주하는 사람의 얼굴을 거꾸로 토템폴에 새겨 넣었다고 한다


(간판이 거꾸로 매달려 있어요. 자세히 보면 가로등에 해달이 그림도 매달려 있음)

기풍은 골목골목에도 넘쳐흘렀다. 오르카 서점의 창문에는 도로 개통 반대 NO ROAD’ 스티커가 붙어 있었다. ‘도로 없이 살 수 없다 주민들은 분노한다식의 개발 촉구 플래카드에 익숙해 있는 나는 당혹스럽고도 신선했다. 코르도바도 도로가 이어지지 않아 배나 비행기로만 접근이 가능한 오지다. 굳이 주정부에서 도로를 뚫어 주변 대도시와 연결시켜 주겠다고 나섰는데, 주민들이 고유한 문화와 전통이 사라질 수 있다며 반발했다는 이야기다. 이 담대한 주민들은 지역 박물관에 조그맣게 액손 발데즈 코너를 만들어 당시 흙과 방제복, 자료 같은 것들을 전시하고, 액손사로부터 사이언스 센터를 얻어내 20년이 지난 지금까지 환경 모니터링을 하고 있다. 서점 옆 삼각주 환경 센터에서는 알래스카 송유관에서 기름이 유출될 경우 알래스카의 생태계가 어떻게 달라지는가를 그림과 도표로 무시무시하게 설명해 준다.


(커뮤니티 박물관에 전시된 액손 발데즈 기름 유출 사건 당시의 자료들)

공동체의 활력은 전방위로 넘쳐흘렀다. 매년 2월이면 눈 속에 산다고 전설처럼 전해지는 눈 벌레, ‘아이스 웜축제가 열린다. 주민 자원 봉사로 꾸려지는 아이스 웜 홍보 센터에서는, 옆 찻집에서 차를 마시던 할머니가 입술을 닦고 나와 설명을 해 줬다. 피자집 아저씨가 피자를 내 놓고, 찻집 아줌마가 차를 준비하고, 아이들이 눈벌레 복장으로 가장 행렬을 벌이는 주민 축제란다. 나는 여기서 충남 태안의 삼성중공업 기름유출 사고에 대해 고통스러운 마음으로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기름으로 못 쓰게 된 어장에서 하루하루 날품을 팔던 할아버지 할머니들은 하루아침에 일자리를 잃어버렸고, 벌써 4명이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삼성중공업이 10여차례 남몰래 기름을 닦고 갔다는 건 알고 있지만, 그 뒤로 무엇을 했는지는 기억에 없다. 수십년이 흘러 태안 앞바다에 상괭이와 뿔논병아리들이 다시 돌아오게 될 때, 그 때 구름포와 만리포의 공동체는 어떻게 바뀌어 있을까. 아니, 그 때까지 존재할 수 있기나 할까.



Posted by orca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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