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톡홀름은 쌀쌀맞은 도시였다. 공기부터가 쌀쌀했다. 공항버스 안에서 오오 역시 북유럽은 춥다며 긴 팔 남방을 꺼내 입었는데, 결국 돌아가는 공항버스를 탈 때까지 벗지 못했다. 8월말이었다. 해는 길었지만 자주 뜨지는 않았다


감라스탄 구시가 도 잔뜩 흐려 있었다
. 커다란 삐삐 인형 앞에서 브이자를 그리며 사진을 찍고 있으니, 점원이 나와 주먹을 입에다 대고 헛기침을 했다. 지도도 불친절했다. 골목은 좁았고, 그 골목이 그 골목 같아서 자꾸만 길을 잃었다. 쌀쌀맞지 않은 건 수학여행이라도 온 듯한 꼬마들뿐이었다. ‘세계에서 가장 좁은 골목길저편에서 한 놈씩 돌림노래로 니하오” “니하오키득거리며 뛰어갔다. 요놈, 딱 걸렸다. 이게 세계에서 제일 좁은 골목길이면 너희 나라 지리 지식에 심각한 문제가 있는 거다, 고 주장이라도 할까 싶었다. 스무 시간 가까이 비행기를 타고, 공항에서 세수하고, 기차역에 짐 맡겨 놓고, 지도 들고 헤맨 끝에 찾은 게 겨우 이 골목일 수는 없었다



(감라스탄 구시가의 우울한 골목길)

증권거래소
1층의 노벨상 전시관 찍고, 시청사 돌아, 왕궁 앞에 다다랐을 즈음엔 손으로 다리를 한 짝씩 들어 옮겨야 할 판이었다. 부릅떠도 자꾸만 눈이 감겼다. 마침 근위병 교대식이었다. 빨간 베레모를 쓴 근위대가 4열종대로 보무도 당당하게 왕궁으로 다가왔다. 내 평생 이렇게 군기 빠진 근위병들은 처음이었다. 다른 나라 근위병들은 얼굴에 파리가 붙어도 눈썹 하나 깜짝 않는다는데, 빨간 베레모 몇 개는 좌향 좌! 구호에 결연히 오른쪽으로 돌았다. 어이없어하는 나와 눈이 마주치자 겸연쩍게 웃기도 했다. 역시 북유럽의 공기는 자유로운 모양이었다. 군악대는 잘 맞지 않는 박자로 차이코프스키 피아노 협주곡 1번을 연주하고 있었다. 풍경이, 예쁘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학교 앞 팬시점에서 파는 노트 표지 사진 같았다. 좁고 높은 집들이 벽도 없이 어깨를 기대고 골목의 끝까지 이어졌다.


스톡홀름에서는 배에서 잤다. 물가 비싼 스톡홀름에는 두 개의 저가 숙소가 있다. 하나가 감옥을 개조한 호스텔이고, 나머지 하나가 여객선을 개조한 호스텔이다. 곰곰이 생각을 해 봤는데, 감옥과 배와 호스텔은 싼 값에 독방을 제공한다는 공통점이 있긴 하다. 운명은 모를 일이어서, ()감옥이 ()여객선보다 훨씬 비쌌다.


범선 호스텔이 정박돼 있는 스톡홀름 항구로 가면서 그래도 마음이 들떴다
. 바야흐로 물 위의 하룻밤 아닌가. 그러나 선원실이라는 것이 최소 공간에 최대 인원을 적재하기 위해 설계된 곳임을, 방문이 꽝 하고 닫히는 순간 비로소 깨달았다. 2층 침대를 중심으로 거울, 샤워기, 세면기가 모두 빌트 인돼 있었다. 누우면 머리와 다리가 정확하게 벽과 벽에 닿았다. 바람이 부는지 배가 천천히 삐그덕거렸다. 그래, 그래도 바다다. 손바닥만한 창문을 비틀어 열었다. 앞이 새카맸다. 물에 젖은 이끼 위로 거미 한 마리가 슬금슬금 지나갔다. 항구에 닻을 내린 배에서는, 누군가의 창문은 부두를 보게 돼 있다. 그게 이 방이었다. 창문 틈으로 부둣가를 달리는 자동차들의 불빛이 달빛인 양 들어왔다. 그날 밤 밤새 뒤척이며 나는, 세상의 모든 선원을 존경하게 됐다. 타이타닉호를 타고 대서양을 건넜으니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도 존경하기로 했다.


다음날에는 기차를 타고 라트비크로 갔다. 스웨덴 중부 실잔 호숫가의 작은 마을이다. 스톡홀름 같은 대도시엔 남아 있지 않은 스웨덴 고유의 시골 풍경을 찾아서 갔다고 하면, 미안하지만 거짓말이다. 기차를 타 보고 싶었는데, 적당한 거리에 호수가 있었고, 마침 호숫가 마을에 호스텔도 있기에 갔다. 열차는 스톡홀름 중앙역을 저녁 555분에 출발했다. 3시간30분 거리니까, 도착해도 해가 남아 있을 것이었다. 북극곰은 역 앞 마트에서 산 파스타 샐러드를 먹고, 나는 스웨덴 돈을 꺼내 놓고 접사를 시도했다. 지폐 뒷면에 닐스가 거위 몰텐을 타고 날아가는 그림이 그려져 있었다. 스피커에서 웅얼웅얼 소리가 났다. 세 번 났다. 그 때 뒷자석 남자가 의자를 쿡쿡 찔렀다. 혹시 안내방송 들으셨어요? 그렇죠, 스웨덴 말이어서. 지금 선로에서 사고가 났대요. 다음 역에 내려서 버스를 타고, 다시 기차를 타라고 하네요."



(거위 몰텐을 타고 가는 닐스가 그려져 있는 스웨덴 돈입니다)

정말로 사람들은 다음 역에서 모두 내렸다
. 내가, 불의는 참아도 불이익은 못 참는다. 일단 차장에게라도 따져야겠다며 소매를 걷어붙였다. 사회 시스템 잘 갖춰 있기로 소문난 북유럽에서, 1365일 중 오늘, 그것도 내가 탄 기차 시간에 맞춰, 그 노선에서 사고가 날 건 뭐란 말인가. 마침 비까지 부슬부슬 내리고 있었다. 승객들은 그러나 불평 한 마디 없이 조용히 철도 회사가 대기시켜 놓은 버스에 오르고 있었다. 눈이 마주친 한 할머니가 싱긋 웃으며 신문을 펴고 사과를 꺼내 베어 물었다. 이 사람들은 바쁘지 않은 것일까. 아니면 이건 어쩔 수 없는 일이라고 생각하는 것일까. 우리 차례가 왔다. 슬그머니 소매를 내리고 온 몸의 힘을 모아 차장에게 한 마디 던졌다. “땡큐


버스는 웁살라역에서 살라역까지 가는 것이었다. 웁스, 이런 헷갈리는 지명으로 나더러 어찌 살라고. 헷갈리는 것은 지명만이 아니다. 가이드북에도, 스웨덴 역사책에도, 관광지 안내문에도 보면 스웨덴 남자들은 이름이 카를’ ‘구스타프아니면 바싸. 웁살라에는 심지어 카를 구스타프 바싸라는 이름의 왕도 있었다. 그러고 보니 그 날 아침 메뉴에 호밀을 갈아 바싹 구운 것 같은 얇은 빵이 나왔는데, 그 빵 브랜드도 바싸였다. 몇 안 되는 고유명사를 알뜰하게 이용하는 스웨덴의 합리성에 대해 열띤 토론을 벌이고 있는데, 갑자기 사람들이 버스에서 후다닥 내렸다. 우리도 덩달아 뛰었다. 배낭에 매달아 놓은 등산컵이 의자 손잡이마다 부딪쳐 창피하게도 챙강챙강거렸다.


이름 모를 간이역이었다. 플랫폼에 매달려 있는 역의 이름은 Morgongava, ‘모르고()가바. 정말 모르고 가고 있는 중이었다. 알뜰할 뿐 아니라 여행자의 마음까지 읽는 인공지능 지명이아닐 수 없었다. 맞은편 선로로 들어오는 열차를 타고, ‘살라역에서 다시 갈아타고, 라트비크에 도착한 것은 밤 11시가 넘어서였다. 그 긴 북유럽의 여름 해도 이미 저물어 있었다. 은하계를 헤매는 철이와 메텔처럼 눈동자를 불태워 호스텔에 도착했다. 현관 도어매트 아래 열쇠와 함께 내 이름이 적힌 봉투가 놓여 있었다. “라트비크에 오신 걸 환영합니다! 숙소는 깨끗이 쓰시고요, 저쪽에 대걸레와 빗자루가 있으니 자기가 어지른 방은 자기가 치우고 가세요. 안 치우면 벌~! -에바북극곰의 코에서 주르륵 코피가 흘렀다.



(라트비크 실잔 호숫가의 조그만 교회에요. 마굿간이 87개나 있다는 믿을 수 없는...)

라트비크는 조그마한 시골 마을이었다
. 자전거로 한나절 둘러보기 딱 좋을 크기였다. 마굿간이 87개나 있었다는 믿을 수 없는 주장의 라트비크 교회에 가 보고, ‘아마도 세계에서 가장 긴 부두라는 몹시 회의적인 이름의 628미터짜리 긴 부두도 구경하고, ‘구스타프 바싸왕이 덴마크인을 무찌르고 세웠다는 가짜 룬스톤도 구경했다. 기차역 앞에도, 식당 선반에도, 서점에도 나무로 깎은 작은 말들이 있었다. 스웨덴 중부 지방 특산품이라고 했다. 오후에는 라트비크 도서관에 가서 이메일도 확인하고, 스웨덴의 이마트쯤 될 헴콕 수퍼에서 과자도 사 먹고, 강둑에 앉아 다리도 흔들었다. 오리 가족이 지나가면서 물에 비친 건물 그림자가 흔들리는 걸 보는 게 좋았다. 헤세의 소설에 나올 것 같은 목가적인 풍경이었다.



(라트비크의 명물 목마. 또가닥 또가닥)

스웨덴에서 돌아오고 일주일 쯤 뒤 북극곰에게서 전화가 왔다
.


라트비크 호스텔 그 때 밤에 청소했었지?”
... 대걸레로 닦진 않았지만 쓸긴 쓸었지. ?”
“‘청소대마왕에바한테 메일이 왔는데? 너희 청소 안 해서 벌금 물린다고.”


뭐라고? 혹시 방 안 닦은 걸 들켰나? 빗자루 대충 세워놓은 게 걸렸나? 옷걸이 위의 먼지를 안 닦아서 그런가, 커피잔에 물이 남아 있었나. , 정말이지 쌀쌀맞은 나라 같으니라고. 그렇다고 투숙객을 추적해 벌금까지 물리는 데가 어디 있어. 씩씩거리느라고, 북극곰이 뭐라고 하는 소리가 기차에서 왕왕거리던 스웨덴말처럼 들렸다.



<생각해 볼 문제>
글쓴이는 정말로 청소대마왕 에바에게서 메일을 받았을까요? 받았다면 무엇이라고 적혀 있었을까요?





Posted by orca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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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kws1070 2011.03.08 20:14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전 지금 스웨덴 진켄스담(T13,14라인)에 있는데 요기도 함 가봐야 겠네요 ㅎㅎ

    아이슬란드 정보 찾다가 우연히 접한 글들 재미나게 읽는 중입니다 ^^

    제가 묶은 숙소에는 다행이 벌금 물리진 않더군요 ㅋ

    지금도 스웨덴에 계신건가요??

    실시간 업데이트??